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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사

"그는 헌법과 권력을 헷갈리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을 기억하며] "비굴함을 거부한 그 이름은 '노무현'입니다"


"그는 헌법과 권력을 헷갈리지 않았습니다"
(서프라이즈 / 정재형 변호사 / 2009-6-1 13:16)



"그는 헌법과 권력을 헷갈리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을 기억하며] "비굴함을 거부한 그 이름은 '노무현'입니다"

(프레시안 / 정재형 / 2009-06-01)


들은 바로는, 그는 그렇습니다.

그를 독종으로 생각했답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부산 법원에서 서기로 일하다 20년쯤 지나서 포항에서 나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가 부산법원에서 일할 때, 1970년대였습니다. 그때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를 한 장 받으러 와도 100원 씩 지폐를 서류에 끼워서 주던 때라고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부패척결'을 외치며 살아 계실 때입니다. 그때 그가 있던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끝까지 그 100원을 주지 않았답니다. 그 사람은 내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당연하지만, 그때는 그 돈을 주지 않는 것은 '따돌림'을 각오한다는 것(법조에서 따돌림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이고, 부조리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저자 말로 '쪼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한달쯤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이 얘기를 전해준 사람은 그가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것이 2002년 초겨울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 그가 당선될 수도 있다는 풍문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기다리면서 소주를 한 잔 마셨습니다. 그 때, 나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가 (당선)되면 우리 나라가 불행해진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누가 그를 상전으로 대접하겠냐고, 차라리 이회창이 (당선)되어서 5년쯤 하면 그때는 그가 놀기 좋은 물이 된다. 모순이 중첩되어 모순이 해결될 때 그가 나서야 한다."

그 때 내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너무 회의적이다, 그리고 정치에 차기가 어디 있냐?"

그는 당선되었습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서 개표방송을 끝까지 보았습니다. 새벽 2시 반쯤, 방송에서 그가 당선됨이 "확정"이라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베란다로 나가 이른 새벽에 담배를 피웠습니다.

우리 국민이 너무 앞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국가보안법, 사학법(개정되었다가 로스쿨과 바꾸었죠), 이라크 파병, 한미FTA….

많은 이들이 욕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생각이 많을 것이라고, 그도 하지 않고 싶지만 '비빌 언덕이 없을 것'이라고"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너무 속도 넓다"

그렇지만 그는 괜찮았습니다.

대통령이 무엇인지를 그는 조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씩 웃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재벌에 대해서 조금 '꿀리는' 듯했지만("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라는 말의 행간을 아시나요) 언제나 국민을(시민을) 웃길 줄 아는 사람이었죠. 그는 욕을 얻어 먹을지라도 약자의 아픈 곳을 만져 주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헌법에 있어서 최초로 '권력'이 무엇인지, 대통령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려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아들-딸들은 헌법과 권력 사이에서 헷갈리지 않을 겁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난 곳은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1988년 경산 가을 축제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그가 국회의원으로서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 던지고 유명해졌을 때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왜 이런 법을 공부해야 하는가?'하고 고민할 때입니다'. 그 때,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부산에서 험하게 놀아서 그런데, 우리 마누라가 그러더라. 당신이 후배들 데리고 오는 것은 좋은데, 제발 당신 앞에서 담배 피는 (여자) 애들에게 이야기해서 우리 집에서 (내가 있을 때는) 피지 말라고 해라"고.

당시 첨예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겠지만 기억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네요. 그 후 2년인가 3년인가 후에 그가 속한 당이 합당했죠. 그때부터 그의 돌베게가 시작됩니다. 그냥 모른 채하고 따라 갔으면….,

그 후로 그는 내 기억에서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 약 1주일 전입니다. 대구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확신에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참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고요? 그는 인재 풀이 없는 당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취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되었죠.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의회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말한 누구가…. 그날 저녁 나는 친구들과 소주를 한 잔 했습니다. 그 때가 기억이 납니다. 참 참담했습니다. 지금처럼….

그는 번번히 지면서도(질 줄 알면서도) 싸웠고, 결국은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싸움의 끝을 보지 않(못하)고 떨어지듯 그도 끝을 보여주지 않고 "낙화"했습니다. 비굴하게 뻔뻔하게 살아 남는 것도 한 가지의 병법인데, 그는 끝까지 그런 방법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노무현'입니다. 그는 저보다 나이가 20살 많고, 사법연수원 기수도 20년 앞섭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재형

 

*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29111729&section=01


ⓒ 정재형 변호사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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