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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만화, 취미

실패를 실패하게 하라

Daum 파워에디터
실패를 실패하게 하라
오늘날 ‘모든 사람의 운명’인 실패를 인정하고 맞서라
이카로스~베케트까지 실패 열쇳말로 본 서양 문화사
한겨레 고명섭 기자
» <실패의 향연>
<실패의 향연>
크리스티아네 치른트 지음·오승우 옮김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의 작품 〈이카로스의 추락〉(1558·아래 사진)을 들여다보자. 그림의 전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쟁기질하는 농부다. 농부의 눈길은 온통 쟁기에 갈리는 땅에 붙박여 있다. 그 아래 양떼를 돌보는 목동이 있다. 목동은 멍하니 저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오른쪽 아래에 낚시질에 정신이 팔린 사내가 쭈그려 앉아 있다. 정작 그림의 주인공인 ‘이카로스’는 눈에 띄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그제야 바다에 거꾸로 처박혀 버둥거리는 다리가 이카로스의 것임을 알게 된다. 아무도 이 신화적 인물의 추락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타인의 실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모두들 제 생각에만 빠져 있는 것이다.

〈실패의 향연〉에서 지은이 크리스티아네 치른트는 이 그림을 “실패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실패가 드러나는 형식을 아무런 감정이입 없이 냉정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 그림이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만들어준 날개를 달고 크레타 섬을 탈출한다. 너무 높이 날아오르면 태양의 열에 날개의 밀랍이 녹아내릴 것이라고 주의를 받지만, 상승의지로 가득 찬 아들은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한다. 이카로스는 한없이 날아오르다 바다속으로 곤두박질친다. 의지가 낳은 몰락이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들 가운데 아무도 이카로스의 드라마를 아는 자가 없다. 심지어 그가 추락했다는 사실조자 인식하지 못한다.

브뤼헐이 이 그림을 그리던 16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막 해상무역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상업자본주의가 팡파르를 울렸다. 그림 속에 등장한 풍채 좋은 범선은 이 시기의 네덜란드 풍경을 들여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저 듬직한 범선도 이카로스의 운명에 무관심하다. 실패는 오직 개인의 실패일 뿐이다. 〈이카로스의 추락〉은 주인공을 “외롭고, 고립되고, 버림받고, 절망하고, 불행한 실패자”로 그렸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실패의 의미를 최초로 보여준 그림”이다.

〈실패의 향연〉은 수많은 이카로스들을 등장시켜 실패의 역사를, 실패의 뒷면과 앞면을 이야기한다. 요컨대, 이 책은 실패를 열쇳말로 삼아 풀어본 서양 문화사다. 지은이 치른트는 전작 〈책※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독일의 에세이스트다. 그 책에서 치른트는 〈성경〉에서부터 〈해리 포터〉까지 수많은 책들을 쌓아 ‘책으로 읽는 문화사’를 꾸며낸 바 있다. 그 책들에서 발견한 것들을 지식의 토대로 삼아 그는 이제 실패의 문화사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를 놔두고 왜 하필이면 실패 이야기인가?

지은이에겐 이 질문에 답할 나름의 문제의식이 있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 실패는 차고 넘치는 사회적 현상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실패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 실패는 “현대 사회 최후의 메가톤급 금기어”다. 다들 실패하고 있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으므로 실패는 철저히 개인의 문제가 된다. 홀로 그 두려운 것을 부둥켜안아야 한다. 실패라는 두려운 것에 침묵하는 것은 두려움을 키울 뿐이다. 실패와 맞서려면 터놓고 실패를 이야기해야 한다.

» 사진 들녘 제공
이카로스의 추락은 ‘한계’에 관한 이야기다. 현대 사회에 실패가 만연한 것은 가능성의 지평이 무한히 확장됐기 때문이다. 어디가 불가능한 국면인지 알지 못하고 인간은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한계상황에 부닥치고 날개의 밀랍이 녹아내린다. 지은이는 이런 한계상황에 관한 고전적 영웅담으로 호메로스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지목한다.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끝없는 실패의 연속이다. 암초와 소용돌이와 폭풍우와 괴물이 그의 항해를 방해한다. 이 서사시 안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직면한다.” 오디세우스는 예측불허의 난관과 싸운다. 그의 방황은 10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항해와 표류와 난파의 삶은 현대인의 운명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현재적이다. 오디세우스보다 더한 실패도 있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다. 그는 신들이 설정한 운명의 덫에 걸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마침내 그 되돌릴 길 없는 끔찍한 진실을 알았을 때 그는 자기 눈을 찌른다. 눈 뜨고도 보지 못한 자기 자신을 처벌하는 것이다. 그는 명예와 권력과 자식과 아내를 모두 잃는다. 단단했던 땅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꺼져버린다.

고전 시대의 ‘실패’는 영웅들의 운명이었다. 이 예외적 운명이 모든 사람의 운명이 된 것은 근대의 축복이자 저주다. 누구나 성공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축복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실패하고 추락할 수 있기 때문에 저주다. 19세기 산업시대가 되면서 실패의 일반화는 가속 페달을 밟는다. 실패의 어두운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사람들이 실족하기만을 기다린다. 이 시대에 등장한 것이 보헤미안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실패가 모든 사람의 운명이라면 실패를 삶의 양식으로 삼아 버린다는 발상이 등장했다. 낙오한 예술가들이 ‘실패의 생활양식’을 앞장서 구축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이 실패인 듯 살았다. 실패 안에서 실패와 겨루면서 실패를 즐겼다. “처음부터 실패를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끌어들여 수용하는 것만큼 잠재적 실패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적합한 방식은 없다.”

보헤미안들이 실패를 미적 생활양식으로 변형했다면, 20세기 초 다다이즘은 실패 자체를 예술화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말해 창조에 일부러 실패함으로써 예술의 본질을 실현하려고 했다. 지은이가 보기에 다다이즘을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여 문학 안에서 실현한 사람이 사뮈엘 베케트다. 베케트는 문학의 실패를 문학화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때마다 실패했다. 늘 다시 시도했다.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좀더 세련되게.” 지은이는 베케트의 이 말에서 실패의 출구를 발견한다. 우리가 늘 실패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실패를 견디면서 ‘한번 더!’라고 외쳐보자는 것이다. 실패는 실패다. 그러나 이 실패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렇게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