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만화, 취미

백석(白石)

Always Thanks 2008. 10. 31. 17:14
Daum 파워에디터

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

 

 

 저급함과 경박함과 상스러움만이 난무하는 야만(野蠻)의 시대에 전혀 뜻밖의 사건이 한 시인의 삶과 그의 문학을 추억하게 만들고 있다. 그 주인공은 한때월북시인으로 잘못 알려져 오랜 세월 작품 소개가 금지되기도 했던 천재 시인 백석(白石1912~1995)이다.

주로 문인, 수험생ㆍ교사, 젊은층에서 회자돼온 시인 백석이 대중의 관심 속에 들어온 것은 유산 다툼이 그 발단이 되었다. 서울 성북구 성북2, ‘꿩의 바다라는 별칭이 있는 이곳은 기막힌 풍광으로 여러나라 대사관저가 밀집해 있다. 이 산비탈에는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이 있다.

3공화국 시절 유명한 요정 대원각(大苑閣)이 있던 곳이다. 대원각의 여주인은 1999년 여든세 살로 숨진 영한. 김씨가 1000억원대의 부지와 건물을 아무 조건 없이 길상사 회주(會主)인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사실은 유명한 얘기다.

지난 11월 말 서울지법 민사19부는 김영한씨의 외동딸 서정온(58)씨가 KAIST를 상대로 낸 유류분(遺留分) 반환청구 소송에서 “KAIST는 서씨에게 44억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조정이 성립됐다고 밝혔다. 3년을 끌어온 이번 법정다툼은 김씨가 1999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재산 가운데 현금과 부동산 등 31억원을 딸에게 남긴 반면 나머지 재산인 서울 서초동 빌딩 등 122억원 상당 모두를과학기술 발전에 써달라 KAIST에 기증하면서 발생했다.

김영한씨가 주목을 받는 까닭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보통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기부 정신 외에도 그가 황토색(黃土色) 짙은 서정으로 1930년대 우리 시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백석이 주목을 받는 또다른 이유는 올 대입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서 일어난 복수정답 파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영역 17번 문항은 백석이 1938년에삼천리문학에 발표한 시고향(故鄕)’을 지문으로 제시하고 여기에 나오는의원(醫員)’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을보기’(그리스 신화의미노타우로스와 미궁의 문대목)에서 고르라는 것이었다. 시험을 출제한 교육과정평가원측은 오지선다형 중 정답을 처음에는 으로 했으나 이후 도 정답으로 함께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지금의 30대 이상들은 불행하게도 고등학교에서 백석의 시와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김기림(金起林), 권환(權煥), 김상민(金常民), 설정식(薛貞植), 박팔양(朴八陽), 박세영(朴世永), 백석(白石), 여상현(呂尙玄) 등 월북작가 그룹에 속하는 작가의 작품들이 해금된 것은 1987. 백석의 작품들도 월북작가 그룹에 포함돼 50여년 가까이 금제(禁制)의 좀이 먹고 망각(忘却)의 먼지에 뒤덮인 채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

백석의 시들이 역사의 빛을 받으면서 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중반께부터. 서울의 한 여고 국어교사는백석의 작품들은 현재 최고의 서정시로 평가받고 있으며 학생을 포함한 여러 계층에서 읽히고 있다고 말했다. 고은(高銀) 시인은 2000년 여름, 월간조선에백석 시선집을 한국의 명문으로 추천하면서근대 시사(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시 중의 하나라면서모국어를 사용해 사물과 대상을 관찰하는 정화된 시선이 놀랍다라고 촌평(寸評)을 한 바 있다. 백석의 시는 그동안 모의고사에 단골로 출제되었는데 2004년에는 수능시험 언어영역의 문제로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천재시인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35년 시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은 같은해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일하게 된다. 백석과 김영한의 극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이루어진다.

김영한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그는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기생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한다.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김영한은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앉는다. 그는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배경이 순진했다고 한다. 그는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지만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진향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함흥에서의 운명적 만남그리고 사랑의 도피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비슷한 시기 천재작가 이상(李箱)은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잠시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고, 현재의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다방을 연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여성에 발표한바다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와 관련된 작품이었다.

백석은 어느날바다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이 시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한다.

<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를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조국이 광복을 맞은 후 고향 평북 정주로 돌아와 1948년 잡지학풍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씁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

이 작품이 백석이 서울에서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백석이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월북작가로 분류된 까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함흥과 정주를 마음대로 오가며 문학활동을 하던 백석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면서 북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그는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였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87 9,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이동순 교수는 한 달 뒤인 10,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월북아닌재북작가로 완전 복원 돼

이동순 교수는 김영한으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김영한은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인 이동순 교수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 많은 지난날을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이동순 시인은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창작과 비평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이동순 교수는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이동순 교수는 자야가 글솜씨가 있는 데다 1953년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의 학구파였기에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자야는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입원을 하기도 했다. 김영한 1995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이 교수가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되었다.

이동순 교수는백석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유일한 사례였다면서백석의 작품이 수능시험에 출제되었다는 것은월북 시인에서재북 시인으로의 완전한 복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생전의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내 사랑 백석에서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김영한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원을 출연해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5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비운(悲運)의 시인 백석이 남긴 시()와 비련(悲戀)의 사랑, 그리고 자야의 고결한 영혼은 스산한 이 겨울을 훈풍(薰風)으로 감싸안고 있다.

 

백석은 문단에서모던 보이로 이름을 날렸다.

 

1912년 평북 정주 출생. 본명은 기행

1918년 오산소학교 입학

1929년 오산고보 졸업. 도쿄 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1935 8 31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문단 데뷔

함흥 영생여고보 교원 역임

1942년 만주 안동에서 세관업무에 종사

작품연보

시 정주성(조선일보, 1935), 古夜(조광, 1936)

북관·노루·古寺·山谷(조광, 1937)

바다(여성, 1937) 山宿·饗樂·夜半·白樺(조광, 1938)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여성, 1938)

석양·故鄕·絶望(삼천리문학, 1938)

咸南道安(문장, 1939), 許俊(문장, 1940)

시집 사슴(자가본, 1936)

소설 그 와 아들(조선일보, 1930),

마을의 유화(조선일보, 1935)

수필 耳說 귀고리(조선일보, 1934), 마포(조광, 1936)

동해(동아일보, 1938)

 

故鄕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어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寞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1938, 삼천리문학)

 

바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1937, 여성)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쇠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