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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종교생활

도마복음 풀이 1-25절

깨달음을 위한 안내서
<도마복음> 풀이
물소리


서문 - 독자들께

<도마복음>의 발굴
1945년 12월 어느 농부 형제가 이집트의 북부 나일 강 서쪽 기슭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 부근에서 밭에다 뿌릴 퇴비를 채취하려고 땅을 파다가 땅 속에 토기 항아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귀신(jinn)이라도 들어있으면 어떻게 하나 무서웠으나 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아리를 열어보았습니다. 귀신이 나오지는 않아 안심은 되었지만, 실망스럽게도 보물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오로지 가죽으로 묶은 열세 뭉치의 파피루스 종이 문서뿐이었습니다. 문서가 들어 있는 그 항아리가 금으로 가득한 항아리보다 더 귀중하다는 사실 알 턱이 없던 그 형제는 고문서도 골동품으로 값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팔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굴 경로입니다. 이 문서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추기경이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다나시우스(Athanasius)가 367년 ‘이단적’이라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어 땅 밑에다 숨겨놓은 책들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다나시우스는 그 당시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1947년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olls)’의 발견과 함께 성서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사해 두루마리가 주로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면, 나그함마디 문서는 특히 신약 성서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를 위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 뭉치 속에는 합해서 52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이 문서들은 모두 이집트 고대어인 콥트(Coptic)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콥트’란 ‘이집트’라는 뜻인데, 콥트어 사본이란 고대 이집트 말을 그리스어 문자로 적은 사본입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이름의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마리아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도마복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도마복음>이 전하는 메시지 자체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한대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점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앤드류 하비(Andrew Harvey) 교수 같은 이는 1945년 12월에 발견된 <도마복음>이 같은 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 할 정도로 <도마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마복음> 콥트어 사본은 글씨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 자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작하여 볼 때 기원후 약 100년경, <요한복음>과 비슷한 연대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지만,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50년에서 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략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마가복음>이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되는 <마태복음>, <누가복음>보다 10년 내지 20년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한 복음서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도마복음>이 나그함마디의 콥트어 사본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말 영국 고고학자들이 나그함마디에서 약 250km 떨어진 나일 강 하류 옥시린쿠스(Oxyrhynchus)라고 알려진 고대 쓰레기 처리장에서 그리스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파피루스 뭉치를 발견했는데, 그 중 일부 조각들이 나중 <도마복음>의 일부로 판명되었습니다. 콥트어로 된 나그함마디 문서와 달리 이 문서들은 그리스어(희랍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그리스 문자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 200년경에 필사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물론 나그함마디의 <도마복음>과 비교해보면 약간씩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합니다.

<도마복음의> 특성
<도마복음>에 나오는 말씀들 중에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공관복음, 곧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아는 분들에게는 귀에 익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그리스도교 정경에 포함된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이것이 그 당시 이집트, 로마 그리스를 비롯하여 중동 지역 일대에 성행하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영향을 반영하는 문서라는 점입니다. 영지주의는 복잡한 사상체계이지만, 그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말세, 심판, 대속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ōsis)’을 통해 내가 새 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도마복음>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으리라 생각되는 <요한복음>과 비교할 때, 둘 다 우리 내면의 ‘빛’(요1:4)을, 그리고 미래에 있을 종말보다는 ‘태초(요1:1)나 ‘지금’(요5:25)을 강조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점은 <요한복음>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6)고 하거나 예수님을 ‘나의 주요 하나님’(요20:28)으로 믿는 등 ‘믿음(pistis)’을 강조한데 반해 도마복음은 일관되게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영지주의의 모든 것을 완전히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보는 데는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도마복음>을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라 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1979년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라는 책을 내어 <도마복음>을 비롯하여 이른바 ‘영지주의 복음서’를 세상에 널리 소개한 프린스턴 대학교의 일레인 페이젤스(Elaine Pagels) 교수마저도 최근에 낸 <도마복음>에 관한 그의 책에서 그 주장을 일부 인정했습니다.

제가 보기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면 영지주의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우주론, 신관, 인간론, 구원관 같은 여러 가지 가르침들 중 무엇보다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깨달음을 통해 옛 자아에서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받아들인 것이라 보입니다. 물론 구태여 영지주의라고 하는 한 가지 사상체계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할 것 없이 세계 종교 전통 어디서나 발견되는 ‘신비주의’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복음서로 보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한문으로 ‘영지(靈知)’라 번역하고 영어로 보통 ‘knowledge’라 옮기는 그리스어 ‘gnōsis’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깨침’ 혹은 ‘깨달음’에 해당하는 말로서 꼭 영지주의에서 특허를 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prajñā), 곧 반야(般若), 통찰, 꿰뚫어 봄, 직관과 같은 계열의 말입니다. 불교에서 반야를 통해 성불과 해탈이 가능해짐을 말하듯, <도마복음>도 이런 깨달음을 통해 참된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도마복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만 적은 ‘어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출생이나 활동 등 행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마저도 없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렇게 어록으로만 이루어진 <도마복음>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기 위해서나, 길거리에서 종교적인 문제를 놓고 논쟁할 때 쓰기 위해서, 혹은 신비적 명상을 위한 화두 비슷한 것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보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해 쓰여졌든지, 저는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천국, 내 속에 있는 하느님,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발견함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라는 기본 가르침에 충실한 복음이라 봅니다.

이 풀이에서 하려는 것

제 자신 오래 전 성서 그리스어(희랍어)를 열심히 배우기는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콥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습니다. 물론 이른바 영지주의 복음서가 본래부터 콥트어로 쓰여졌던 것은 아니고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코이네 그리스어에서 번역된 것이라 봅니다. 아무튼 여기 우리말 번역은 <도마복음>서의 콥트어에서 직접 번역하지 못하고, 영어로 번역된 여러 가지 번역판과 역주를 기초로 한국말로 옮겼습니다.

여기 이 풀이에서 저는 모두 114절로 나누어져 있는 <도마복음> 본문을 한 절 한 절이 읽고 제 나름대로 찾아낸 뜻에 대한 저의 반응을 중심으로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이 풀이가 다른 신학자들의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면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제 자신의 배경을 살려 다른 종교 전통의 문헌들, 특히 <도덕경>과 <장자> 등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과 비교하면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도마복음> 본문 자체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최선을 다해 찾아보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말씀들이 지금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그 말씀의 더욱 깊은 종교적인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이 말씀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거기에 ‘촉발’되어 내 나름대로의 뜻을 찾아보려는 이런 식 읽기를 두고 ‘환기적(evocative)’ 독법 혹은 ‘독자 반응 중심의’ 독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일단 이런 작업을 거친 다음 다른 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도 살펴보고 그들의 풀이가 제게도 의미 있다고 여겨질 경우 그 생각들을 일부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독자들은 물론 저의 풀이에 나타난 저의 생각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독자들도 독자 나름대로 읽으시되 제가 읽은 것을 보시고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해 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혹시 제가 읽는 방식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뛰어넘고 본문만 읽으시면서 홀로 명상해 보는 방법을 취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제가 읽은 방식이 독자 스스로 더욱 깊이 읽으시는데 약간의 자극제나 일깨움의 실마리라도 될 수 있다면 그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할 따름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는 저의 <도덕경>이나 <장자> 풀이를 쓸 때 노자님이나 장자님의 말을 모두 경어체로 옮긴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경어체로 옮겼습니다. 30세 정도의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반말로 했다고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자들이라 하더라도 자기와 나이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터인데, ‘너희는 들으라’하는 식으로 말했으리라 상상하기가 곤란합니다. 물론 지금의 ‘개역개정’ 성경이나 ‘표준 새번역’ 성경에 예수님의 말씨를 모두 반말로 하였기에 거기 익숙하신 독자들에게는 이런 존댓말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처음에는 좀 어색해 보일 수 있으리라 이해합니다. 그러나 좀 읽다가 보면 이런 모습에서 오히려 더욱 친근감이 느껴지는 예수님을 발견하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어색해서 못 읽겠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현재 한국 교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의 표현법으로 옮긴 것을 밑에다 함께 실었습니다. 두 가지를 다 읽으셔도 좋고, 마음에 드는 것 어느 쪽을 택해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또 본문에는 없지만 가독성을 위해, 그리고 색인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 절에 제가 생각한 소제목과 부제를 붙였습니다.

부디 이런 귀중한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를 받아 더욱 풍요로워지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7년 가을
캐나다 밴쿠버에서


<도마복음>

서언
살아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
-도마 전통의 성립

이것은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들입니다.
--이는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 적은 비밀의 말씀이라.

풀이: <도마복음>에 나오는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로 가장 깊은 차원의 진리를 찾는 몇몇 소수만이 꿰뚫어 볼 수 있는 ‘비밀의 말씀’이다. 뒤에 나오는 23절에 표현한 것처럼 ‘천 명 중에 한 명, 만 명 중에 두 명’ 꼴이라고 할 정도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관심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이다.

종교적 진술에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피(exoteric) 층이 있고, 정말로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내밀(esoteric) 층이 있는데, 여기 이 말씀은 바로 내밀적 기별, 감추인 말씀, 비밀, 신비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서 성립된 ‘도마 전통’에서 이해한 대로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디두모(Didymos)’는 그리스어, ‘도마(Thomas)’는 아람어/시리아어, 둘 다 ‘쌍둥이’라는 뜻이다. ‘쌍둥이’가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디두모 유다 도마’를 문자 그대로 하면 ‘쌍둥이 유다’라는 말이 된다. 물론 여기의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가룟 유다와 다른 유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름 ‘도마’를 그대로 쓰는 것이 보통이다.

예수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은 도마가 육체적으로 쌍둥이라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한 분 하느님에게서, 혹은 한 태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과 쌍둥이라 이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마복음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깨치기만 하면 모두가 다 형제자매 내지 쌍둥이들이 될 수 있다.

제1절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 해석의 중요성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이 말씀들을 올바로 풀 수 있는 자는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풀이: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적 진술에 대해 어떤 ‘해석(hermenutics)’을 하느냐가 우리의 영적 사활에 관계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중차대한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를 예로 들어본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내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산타 이야기는 나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하다. 일 년 내내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우리 동네에 100 집도 넘는 집이 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밤 열두시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것에 의하면 호주는 지금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눈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아빠 엄마가 내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이렇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이구나. 이제 엄마 아빠에게서 선물 받을 것만 바랄 것이 아니라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하는 단계로 심화된다. 산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과 평화스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산타 이야기는 교회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사랑과 우의를 나누고 공동체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되고, 그러다가 교회나 동네 뿐 아니라 온 나라, 혹은 세계 여러 곳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까지 생각는 사회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좀 더 장성하면, 혹은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란 어쩌면 신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땅과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 신인합일의 ‘비밀’을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깊은 신비적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깨닫게 된다.

사실 산타 이야기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적 이야기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뜻이 다중적(多重的)으로 혹은 중층적(重層的)으로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영지주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네 가지 의미 층이 있다고 한다. 문자적(hylic) 의미가 있고, 나아가 심적(psychic), 영적(pneumatic), 신비적(mystic)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진술을 대할 때 우리는 올바른 풀이를 통해 점점 더 깊은 뜻을 깨달아 나가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고 문자적이고 표피적 뜻에만 매달리면 우리의 영적 삶은 결국 죽어버리고 만다. 바울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후3:6)고 했다.

이처럼 올바른 풀이를 통해 여기 주어진 메시지의 가장 깊은 차원의 영적·신비적 뜻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우리 속에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하게 되므로 새 생명을 찾을 수 있다. 육체가 죽어도, 옛 사람이 죽어도 그 속에 죽지 않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 도가(道家) 사상가 장자(莊子)에 의하면, 들음에 4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귀’로 듣는 단계, ‘마음’으로 드는 단계, ‘기(氣)’로 듣는 단계, ‘비움[虛]’을 통해 도(道)가 들어와 도와 하나 되는 단계를 말한다. 똑 같지는 않지만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물리적 차원, 심적 차원, 영적 차원, 신비적 차원과 대략 상응하는 것 같아 신기하게 여겨진다. 이렇게 세 단계를 지나 완전이 마음을 비우고 우리 속에 도(道)가 들어오도록 준비하는 과정을 두고 장자는 ‘심재(心齋, 마음 굶김)’라고 했다. (오강남 풀이 <장자> 183-188).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말은 <도마복음>에 네 번 나온다. (18, 19, 85, 111). 이런 표현이 나오는 곳의 가르침은 특별히 중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첫 절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영적 사활과 관계된 것이라 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이 말을 한 ‘그’가 예수인가 도마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제2절
찾으면 혼란해 하고
- 발견의 충격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구는 자는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구할지니,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라리라. 그제야 저가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풀이: 문자적이고 표피적인 뜻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이 더 깊은 뜻을 알게 되면 일단은 당황할 정도로 황당함을 느끼게 된다. 혼란스럽고 고민스럽다.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오던 통상적 견해들(taken-for-granted views)이 흔들림에 따라 ‘흔들리는 토대’ 위에 선 것 같은 기분이다. 진리는 본래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어로도 ‘inconvenient truth(불편한 진리)’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새로 발견된 진리에 심지어 저항하거나 반항하기까지 한다.

훌륭한 종교적 가르침은 ‘편안한 사람에게는 혼란을, 혼란한 사람에게는 편안을 주는’(Disturbing the comforted, comforting the disturbed) 일을 한다고 한다. 언제나 안전지역에서 편안한 삶,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삶만을 보장하는 종교는 우선은 편할지 모르나 우리의 성장과 발돋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불교에서 사용하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도 우리의 상식적인 의식에 혼란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아무튼 이런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말씀의 더욱 깊은 뜻을 깨닫게 되면, 놀랄 수밖에 없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하다. 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놀라운 은혜’이다.

우리의 종교적 삶에서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정치적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남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어느 것에도 지배받지 않고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이해관계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의 감언이설에서도 자유스러워지고, 사후에 천국에 갈까 지옥에 갈까 하는 걱정에서도 해방된다. 이렇게 깨달음과 놀라움으로 크게 ‘아하!’를 외칠 수 있는 경지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선언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겠는가. 이 절의 그리스어 버전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유를 얻었으면 편히 쉬게 된다고 하였다. 쉰다는 것은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다.

여기 이 절의 말은 영적 진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 일반을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고, 특별히 이 <도마복음>을 읽어갈 사람들을 두고 미리 경고하고 격려하는 말이라 할 수도 있다. <도마복음>에는 지금껏 표피적으로 이해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예수, 완전히 다른 구원관, 완전히 다른 신관, 완전히 다른 종말관 등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겠지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결국에는 놀라움과 자유를 맛보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제3절a
천국이 하늘에 있으면 새들이
- 천국의 현주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은 여러분에게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새들이 여러분들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나라가 바다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물고기들이 여러분들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여러분 안에 있고, 또 여러분 밖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를 가르치는 자들이 너희에게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도다.’고 하니, 그리 하다면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나라가 바다에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이라.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밖에 있느니라.”

풀이: 성경 복음서에 보면 ‘천국 복음’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메시지 중 최초이며 최종이며, 최고의 가르침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나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고, 그 후 계속하여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마4: 17, 24; 막1:14-15, 눅4:14-15 참조)고 한다. 그런데 그 천국이 어디 있는가? <도마복음>은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고 하는 식으로 하늘에는 하늘나라가 없다고 한다. 왜 그런가?

‘천국’은 하늘에 붕 떠있거나 바다에 둥 떠있는 땅덩어리가 아니다. ‘나라’를 뜻하는 성경의 낱말들은 일차적으로 영토가 아니라 ‘주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의 통치원리,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의 임재하심 등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보통 God's sovereignty, rule, reign, presence 등으로 번역한다. ‘나라’를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우리 속에 있는 하느님의 임재하심이라 보아야 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를 강조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고 했다. 특히 <도마복음>에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 밖에도 있다고 한다. 내 안의 내 마음속에도 있고, 내 밖에 있는 내 이웃의 마음속에도 있다는 뜻이라 풀 수도 있고, 절대적인 실재로서의 하느님의 주권이 안이나 밖 어느 한 쪽에만 국한되거나 제한되지 않고 안에도, 그리고 밖에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신의 내재(內在)만을 강조하면 범신론에 빠지고, 신의 초월(超越)만 강조하면 초자연주의 신관에 빠지게 된다. 신은 내재면서 ‘동시’에 초월이라는 역설(逆說)의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 신의 이런 양면성마저 바로 ‘천국 비밀’의 일부인지 모를 일이다.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천국/하늘나라’라고 하는 말은 오해사기 쉬운 말이라는 사실이다. ‘천국/하늘나라’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만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는 모두 ‘신국(神國)/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을 위해 쓰인 복음서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전통에 따라 ‘신국/하나님의 나라’라는 말 대신 ‘천국/하늘나라’라는 말을 썼다. ‘천국/하늘나라’라고 해서 그것이 그 나라가 있을 장소로서의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도마복음>에는 모두 그냥 ‘나라’ 혹은 ‘아버지의 나라’라고 나와 있고 ‘하늘나라’라는 말은 세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편리를 위해 ‘천국’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물리적 하늘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히지는 일이 없이 하느님의 힘, 원리, 현존 등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이해하고 써야 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널리 깔려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라 하는 이들도 다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다. 종교적 가르침이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 층들을 알지 못하고 표피적·문자적 뜻에만 매달려 계속 그것으로만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무리 지도자라 주장해도 우리를 오도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참된 종교 지도자는 누구냐? 유치원 학생들에게는 아이들이 착한 일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문자 그대로 와서 어린 아이들이 걸어놓은 양말에 선물을 주고 간다고 가르치지만, 그 이야기의 더 깊은 뜻도 함께 알고 있어서, 어린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그 수준에 맞게 더 깊은 심리적, 사회적, 영적, 우주적 의미까지 말해 줄 수 있는 지도자라야 참 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2). 이런 전체적인 안목이 없이 표피적인 뜻이 전부인줄 알고 가르치는 지도자를 따르는 것은 장님이 장님을 따르는 것과 같다.

제3절b
네 자신을 알라
- 풍요로움과 가난의 지렛목

"여러분 자신을 아십시오. 그러면 남도 여러분을 알 것이고, 여러분도 여러분이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가난에 처하고, 여러분이 가난 자체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 그러면 남도 너희를 알 것이고, 너희도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가난에 처하고, 너희가 가난 자체라.”

풀이: ‘네 자신을 알라.’ 그 유명한 ‘그노시 세아우톤’이다.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의 말이라 알고 있지만 사실은 델타 신전에 쓰이어져 있던 신의 신탁(神託)이었다. 그 당시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삶에서 앎/깨침(gnosis)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사람들은 다 알던 말이다.

알아야 할 것, 깨쳐야 할 것 중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내가 바로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사실, 내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侍天主)는 사실, 이 하느님이 바로 내 속 가장 깊은 차원의 ‘참나’ 혹은 ‘얼나’에 다름 아니라는(人乃天)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달음’--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삶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진주’ 같은 진리다. 본문에서 말할 것처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자각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를 알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나의 이기적인 자아가 그대로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미망의 삶, 이런 기본적 무지에서 시작하여, 나의 행동이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가 아니한가에만 관심을 두고 노심초사하며 사는 율법주의적인 삶, 남의 눈치나 보고 남의 인정이나 받으며 남보란 듯 살려는 허세의 삶, 아무리 가지고 가져도 계속 가지고 싶은 욕망을 품고 허기지게 사는 소비주의적인 삶 등의 삶이 ‘궁핍하고 비참한 삶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4절
늙은이도 갓난아기에게서 배우고
- 영적 서열의 전도(顚倒)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7일 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이레 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하지 말지니, 그리하면 그는 살 수 있으리라. 먼저 된 자들 중 많은 이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이니라.”

풀이: 나이를 많이 먹은 늙은이도 내 속에 있는 천국, 나의 참 나를 깨닫지 못해 생명의 원천을 찾지 못했으면 이제 방금 깨달음을 통해 새로 갓 태어난 사람에게 생명의 근원에 대해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참 삶을 얻을 수 있다. 연대기적인 나이만 많았다고 먼저 된 자들이 될 수 없다. 히브리 성경 욥기에도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도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욥32:8-9)고 했다. 누구나 깨달음을 받아 다 같이 새 생명으로 다시 탄생해야 되고, 모두가 이렇게 되면 먼저 된 사람이냐 나중 된 사람이냐 하는 구별이 없이 다 하나가 된다.
7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 아기는 8일째 할례를 받는데, 아직 할례도 안 받은 갓 난 아기를 뜻한다. 할례 전이기에 아직 남녀의 구별이 확인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라 볼 수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마11:25, 눅10:21)를 연상시킨다. 도덕경에도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습니다.”(55장)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모든 경우 ‘갓난아기’란 자연적인 갓난아기라기보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서 영적으로 갓난아기가 된 사람, 그리하여 남녀, 선악, 미추, 시비 등 이분법적 의식을 넘어선 합일의 사람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22절에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있기에 거기 가서 더욱 상세히 다루려 한다.

제5절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면
- 발견의 선후(先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감추어졌던 것이 여러분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묻히어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라. 그리하면 감추어졌던 것이 너희에게 드러나리라.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도다. 묻히어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니라.

풀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여기 “감추어졌던 것이 여러분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묻히어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하는 말은 <도마복음>을 비롯한 나그함마디 문서의 운명 자체에 대한 언급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박해로 천6백년이나 땅 밑에 감추어져 있었지만 결국 1945년에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던가.

여기 본문에서 ‘감추어졌던 것’이란 물론 ‘천국 비밀’이다. 그런데 우리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면’ 이 천국 비밀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 현상 세계에서 우리가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현상적인 사물들일까? 그렇게 풀어도 좋다. 개별적인 사물을 궁구하므로 그것들의 근원이 되는 궁극실재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귀납적(歸納的)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우리 존재의 근원이 되어 지금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 주는 바로 그 근원, 궁극실재, 도, 하느님을 우리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분별의 세계, 이분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지만, 천국이, 궁극실재가, 궁극 진리가 지금 여기에, 내 바로 앞에, 내 안에 있다는 이 기본적인 사실만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기만 하면 지금까지 깜깜하던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날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망 때문에, 우리의 무지 때문에,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 때문에, 그대로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일단 천국의 비밀을 아는 깨달음에 이르면 드러나지 않을 것도, 땅 속에 묻혀 있을 것도 없다. (막4:22, 마10:26, 눅12:2, 눅8:17 등 참조)

<도덕경>에도 “어머니를 알면 그 자식을 알 수 있습니다.”(52장)고 했다. 우리의 어머니로서, 존재 근원으로서 우리 바로 앞에, 옆에, 아래위에 있는 그 도(道)를 알면 모든 현상을 꿰뚫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신유학(新儒學) 주자(朱子)도 사물을 궁구하고 앎을 극대화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과정에서 모든 사물에 관통하고 있는 이(理)를 아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고, 육상산(陸象山)은 우리가 알아야 할 근본적인 것이 마음이라고 했다. 모두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영적 추구에서 근본적인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 준다는 면에서는 대동소이한 것 아닌가.

마지막 구절 ‘묻혔다가 올라온다.’는 표현은 나그함마디 사본에는 없고 그리스어 사본에만 있는데,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진리를 깨달음으로 옛 나에서 죽고 새로운 나로 부활한다거나, 묻히어져 잊어버리고 있던 나의 참 자아가 재발견되고 되살아난다거나, 칼 융이 말하는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해서 내 속에 묻혀있던 무의식의 세계가 다시 올라 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는 뜻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제6절
금식을 할까요?
- 우선 순위의 확인

예수의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할까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구제해야 합니까? 음식을 어떻게 가려 먹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하늘 앞에서는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드러나지 않을 비밀도 없고, 나타나지 않고 있을 숨김도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금식을 하리까?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이까? 구제해야 하나이까? 음식을 어떻게 가려 먹어야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거짓말을 하지 마라.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모든 것이 하늘 앞에서는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니라. 결국 드러나지 않을 비밀도 없고, 나타나지 않고 있을 숨김도 없느니라.”

풀이: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이 한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다.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14절에 나온다. 그럼 여기 동문서답처럼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금식이나 기도나 구제나 음식 가려 먹는 문제보다 더욱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바로 거짓이 없이 내 자신에게 진정으로 솔직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깊은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 참 나의 소리, 내 속에 계신 하느님의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거기에 거짓이 없이 성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모든 외부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행위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런 형식적 종교 행위를 내면 싫어하면서도 남의 눈을 의식하여, 그 외에 경제적, 사교적, 정치적, 종교적, 직업상의 이유로, 겉으로는 좋아하는 척, 따르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선(僞善)이기 때문이다.

공자님은 이런 솔직한 태도를 ‘직(直)’이라 했다. 영어로는 ‘straightforwardness’라 번역한다. 이런 솔직함을 바탕으로 하고 이를 예(禮)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인(仁)의 사람, 곧 ‘사람됨(humanity)’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를 속이지 않고 자기의 호불호(好不好)를 분명히 알아야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도 해 줄 수 있는 이른바 황금율(黃金律, golden rule)을 실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나 자신이나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과 형벌 받을 것이 두려워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속이고 감추어 봐야 쓸데없고, 결국은 모든 것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내 행동의 결과는 나중 하늘이 내리는 보상이나 형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내 자신의 삶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인 것으로 그대로 드러남으로 나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제7절
사람이 사자를 먹으면
- 야수성(野獸)의 극복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행복합니다. 그 사자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복이 있도다. 그 사자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라.”

풀이: 이런 난해한 구절은 읽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풀이될 수 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갔던 사람이 사자에게 잡혔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엎드려 있는데, 사자가 자기를 먹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살짝 눈을 떠서 올려다보니 사자가 식사 기도중이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선교사가 결국 사자에게 먹힘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 선교사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은 물문가지.

물론 이런 문자적 차원은 넘어서야 할 것이다. 이 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우선 우리 속에 내재하는 ‘사자됨’과 ‘사람됨’이라는 두 가지 힘의 상호 관계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사자’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우리 속에 있는 길들지 않은 야수성(野獸性)--정욕, 무지, 탐욕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야수성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를 잘 길들이고 극복하면 그 야수성도 결국 우리가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 셈이고, 어느 면에서 우리의 일부로 동화된 셈이기 때문에 그 사자는 행복한 사자일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정욕, 무지, 탐욕 같은 야수성에 잡아먹히면 물론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인성이나 신성을 발현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셈이니 불행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전체 문장 구조로 보아서는 마지막 문장에서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이유가 그 사람이 사자가 되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 같은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잡아먹은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되는데 왜 불행하다 하는가? 구태여 의미를 붙이자면 그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 행세를 한다는 뜻이 아닐까? 다 같이 사람의 모양을 가진 사람이지만 한 편에는 야수성을 이기고 참 사람이 된 사람이고, 다른 한 편에는 야수성에 정복당하고 껍데기만 사람 모양을 했을 뿐, 속으로는 사자 같은 야수성을 그대로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계속 잡아먹으려 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사람도 사람이긴 하지만 아직도 사자 같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 속에 있는 신성을 완전히 발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8절
물고기들을 잡아 올린 지혜로운 어부와 같으니
- 버림의 결단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그물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잔뜩 잡아 올린 지혜로운 어부와 같습니다. 그 지혜로운 어부는 물고기들 중 좋고 큰 고기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다른 작은 고기들을 다 바다에 다시 던졌습니다. 그래서 큰 물고기들을 쉽게 골라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 들을 귀 있는 이들은 잘 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은 자기 그물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잔뜩 잡아 올린 지혜로운 어부와 같으니 그 지혜로운 어부는 물고기들 중 좋고 큰 고기 한 마리를 찾은 후, 다른 작은 고기들을 다 바다에 다시 던지매 큰 물고기들을 쉽게 골라낼 수 있었느니라. 들을 귀 있는 이들은 잘 들을지어다.”

풀이: 마태복음13:47-48에도 그물로 잡아 오린 물고기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다 버린다.’고 하면서, 이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놓는 최후의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다. <도마복음>서에는 심판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이것을 심판과 연관시킬 수 없다. 그러면 여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려 하는가?

우리는 모두 어부들이다. 그런데 보통의 어부는 그물에 올라오는 물고기를 다 잡아 온다. 이른바 저인망 방식으로 싹쓸이까지 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소위 성공한 사람이 취하는 전형적 태도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지혜로운 어부’는 큰 고기 한 마리를 위해 다른 고기들은 뒤로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땅에 숨겨 놓은 보물을 찾으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기’로 한 농부나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장사꾼과 같은 사람이다. (마13:44-46) 완전히 똑 같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장자>에서도 “물고기 잡는 틀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것을 잊어야 합니다.”(26:13)고 했다. 이른바 ‘득어망전(得魚忘筌)’이다. 물고기가 중요하기에 다른 것은 잊어버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물고기’, ‘보물’, ‘진주’는 무엇인가? 신학자 폴 틸리히의 표현대로 우리의 ‘궁극관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도마복음>에 의하면 물론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 곧 내 속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 나의 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깨닫고 발견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버린다. 물질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도 잡다한 상식이나 이론이나 견해나 관념이나 범주나 논리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이런 선입관에 입각한 앎을 뒤로 할 때만 참 된 앎, 진정한 깨침, 반야(般若)의 지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경>에도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일손(日損)’의 길이라고 했다(48장). 우리가 가진 일상적 견해를 깨끗이 비워야 도를 체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표현을 쓰면, ‘성전을 청결케 하심,’ 나아가 아주 ‘성전을 허는 것’(요2:13-19)이기도 하다.

한 편 <도마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입장에서도 풀이될 수 있을 것 같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고 있듯 인간은 이 물질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물고기가 인간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도를 깨친 지혜로운 어부가 사람을 건져 올리면, 그 중에서 자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큰 물고기만 고르고 나머지는 그대로 놓아준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출애굽 당시 아직도 이집트(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아직도 불타는 소돔 성을 잊지 못하고 뒤돌아서던 롯의 처와 같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계속 광야를 헤매거나 거기 소금 기둥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천국의 비밀은 아무에게나 주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면 돼지가 진주를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돼지가 그것을 준 사람도 짓밟고 물어뜯는다고 했다(마7:6). 그러기에 천국의 비밀은 일차적으로 그것을 받아 정말로 고마워할 마음의 태세가 갖추어져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감추어진 가르침(esoteric teaching)’이다. 들을 귀가 있는 이들만이 그 깊은 속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9절
씨를 한 줌 쥐고 뿌리는데
- 신성(神性)의 씨앗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씨 뿌리는 사람이 밖으로 나가 씨를 한 줌 쥐고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었습니다. 또 어떤 것은 돌짝밭에 떨어져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함으로 곡식을 내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가시덤불이 숨통이 막고 벌레들이 먹었습니다. 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었는데, 육십 배, 백이십 배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보라. 씨 뿌리는 사람이 밖으로 나가 씨를 한 줌 쥐고 뿌리는데, 더러는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었고,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져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함으로 곡식을 내지 못하였고,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져 가시덤불이 숨통이 막고 벌레들이 먹었고, 또 더러는 옥토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었는데, 육십 배, 백이십 배가 되었느니라.”

풀이: 문자적으로 보면, 이런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씨가 얼마나 귀한 것인데 함부로 뿌려 길이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같은 데 떨어지게 한단 말인가? 더구나 요즘처럼 기계나 비행기로 뿌리는 것도 아니고 직접 손에 쥐고 뿌리는 것인데... 또 씨가 열매를 맺어 겨우 60배, 120배의 결실뿐이라면 그 농사는 망하는 농사가 아닌가? 좁쌀을 보면 수만 배, 수십만 배의 결실인데... 하는 등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천국 복음의 심오한 뜻, 곧 천국 비밀을 조심성 없이 함부로 아무데나 뿌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특히 제8장에서 좋고 큰 물고기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시 돌려보낸다고 한 것처럼, 천국 비밀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길이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같은 사람, 열린 마음, 받아들이는 태도, ‘들을 귀’가 없는 사람, 일방적으로 주어진 교리나 선입견으로 꽉 막힌 사람, 일상사에 정신이 나가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을 쏟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주어 봐도 헛일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역효과까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씨를 뿌릴 때 여기 나오는 씨 뿌리는 자처럼 실수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옥토에 던져서 소기의 열매를 얻도록 하라는 말씀일 수 있다. 옥토는 물론 씨를 받아 발아시키고 열매를 맺도록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옥토가 씨를 받아 발아시키고 열매를 맺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함이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상구보리(上救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보살(菩薩)정신의 실현이다.

또 다른 뜻은 찾을 수 없을까? 물론 여기서 ‘씨’를 말씀이나 진리의 가르침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사적으로 볼 때 여러 종교에서 ‘씨’는 인간 속에 있는 ‘신의 씨앗’ 곧 신성(神性)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특히 중세 시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은 우리 속에 있는 ‘씨앗’을 강조했다. 누구에게나 이런 ‘신의 일부(that part of God)’, ‘로고스(Logos)’, ‘그리스도’ ‘신의 불꽃’이 속에 있지만 지금 나의 지적·영적 상태나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내 속에 있는 씨앗이 지닌 가능성을 발현하지 못하고 사장(死藏)되거나 시들어 없어져버리게 할 수도 있고, 열린 마음으로 잘 받아들여 발아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신성이 어떻게 없어질 수 있을까 할 수도 있지만,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면 없어진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불교에도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우리는 모두 여래, 곧 부처님, 혹은 ‘깨달은 이’가 될 수 있는 ‘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장’이란 ‘자궁’이라는 뜻과 ‘태아’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우리 속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공간과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현실에서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장애물 때문에 그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조: 비슷한 이야기는 막4:3-8, 마13:3-8, 눅8:8:5-8에 있다. 거기에는 소산이 30배, 60배, 100배로 나와 있다.

제10절
불을 지피다
- 우주 의식의 화염(火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불이 붙어 타오르기까지 잘 지킬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세상에 불을 지폈노니, 보라. 나는 불이 붙어 타오르기까지 잘 지키리라.”

풀이: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기본 특징 중 하나는 주어진 사회의 전통적 고정관념을 ‘뒤집어엎음(subversiveness)’이다. 표면적으로 평온한 사회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 불을 지르는 것이다. 이런 혁명적인 뒤집어엎음이 처음에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불이 붙기까지 잘 지켜보고 피워야 한다. 그러나 일단 불이 붙어 훨훨 타오르면, 요원의 불길처럼 그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르는 불이나 훨훨 타오르는 불을 사회적 변혁 뿐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 변화를 가져오는 불이라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세례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물로 받는 것, 영으로 받는 것, 불로 받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발전 단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이 그리스도교에 입문해서 천국의 ‘외적 비밀(outer mysteries)’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쳐주는 죽음, 부활, 천국 등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윤리적 지침이나, 심리적 안위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천국의 ‘내적 비밀(inner mysteries)’을 알게 된다. 죽음, 부활, 천국 등의 가르침에서 문자적 뜻을 넘어 상징적, 은유적, 영적 차원의 뜻을 꿰뚫어 보게 된다. 거기서 더욱 발전하여 불로 세례를 받으면 완전한 깨달음(gnosis)을 얻어 하나님과 하나 됨이라는 천·지, 신·인 합일의 신비 체험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불을 질러 타오르게 하겠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만물과의 합일을 체험하는 이런 궁극적 신비 체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과 같다.

누가복음에도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12:49)고 했다. 개역개정에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로 번역했다. 여기서 ‘받아야 할 세례’라는 것이 바로 불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모두 불로 세례를 받기까지 그가 받을 육체적 고통이나 심적 답답함이 오죽하겠느냐는 뜻이리라.

캐나다 출신의 정신과 의사로서 지금은 고전으로 여겨지는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모리스 벅(Richard Maurice Bucke, 1837-1902)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영국에 가 있을 때, 어느 날 밤 친구들과 함께 휘트먼의 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채 그의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자기 마차가 화염에 휩싸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를 두고 ‘우주 의식’이 번쩍임을 경험한 것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 의식’은 동물들의 단순 의식(simple consciousness)이나 우리 인간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과 다른 특수 의식으로서, 이런 우주 의식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우주의 참된 생명과 질서’, 그리고 인간이 신과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예수님이 지른 불, 온 세상에 옮겨 붙기를 원하는 불이 리처드 벅이 체험한 이런 불이 아니겠는가. 이런 불은 우리를 밝혀주고 변화시키고 따뜻하게 한다.

사실 어느 면에서 예수님 자신이 불덩어리이다. <도마복음> 82절에도 예수님은 “나에게 가까이 있는 이는 불 가까이 있고, 나에게 멀리 있는 이는 나라에서부터 멀리 있다”고 했다.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 그 불을 받아 불의 세례를 받고, 내 속에 있는 천국, 곧 하느님, 나의 참된 나와 가까이 있게 되는 것, 하나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이런 면 때문임을 새로이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11절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 죽음을 이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늘은 사라질 것이고, 그 위에 있는 하늘도 사라질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살아 있지 않고, 산 사람들은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죽은 것을 먹는 날 여러분은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합니다. 여러분이 빛 속에 있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였을 때 여러분은 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둘이 되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하늘은 사라지고, 그 위에 있는 하늘도 사라지리라. 죽은 자들은 살아 있지 않고, 산 자들은 죽지 않으리라. 너희가 죽은 것을 먹는 날 너희는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하노라. 너희가 빛 속에 거할 때 너희는 무엇을 하려느냐? 너희가 하나였을 때 너희가 둘이 되었도다. 그러나 너희가 둘이 되면 너희는 무엇을 하려느냐?

풀이: 오리무중이다. 지극히 이해하기 힘든 절이다. 몇 개의 생각들이 총알처럼 빠르게 하나씩 튀어나오고 있다. 더구나 그 생각들 사이에 내적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다. 어쩌면 이런 불가사의한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 자체가 우리의 안일한 사고를 뒤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해주려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나 ‘화두(話頭)’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천천히 음미해 보자. 화두는 의미를 찾으려 하면 안 된다고 하기는 하지만....

우선 하늘과 그 위에 있는 또 하나의 하늘이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고대 문화 일반에서 보듯, 하늘에 여러 층이 있다고 보았다. 히브리어로 ‘하늘’이라는 말은 언제나 복수형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1장1절 영어번역도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라 한다. 바울도 자기가 ‘셋째 하늘’에 끌려갔다가 왔다(고후12:2)고 했다. 아무튼 유대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하늘과 땅은 없어지거나 변하지 않는 것을 대표한다. <도덕경> 표현으로 ‘천장지구(天長地久)’이다.(7장) 그렇게 변하지 않는 하늘도 사라진다니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인가? 부처님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터스(Heraclitus, 486 BCE 사망)의 ‘만유유전(萬有流轉)(panta rei)’과 같은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 그 자체뿐이라고 한다. 이처럼 변하는 현상세계의 허망함이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102:26)고 하고 <마가복음>에도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3:31)고 했다. 주님 자신이나 예수님 말씀의 항존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늘과 땅의 항구성을 강조한 셈이다. 그렇다면 <시편>이나 <마가복음>에서 하늘과 땅에 대해 언급하면서 주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처럼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하늘도 없어질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살아있지 않고 산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이 사실만은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셈인가?

아무튼 ‘죽은 사람은 살아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이렇게 당연한 말을 그 귀한 파피루스 종이를 허비해 가며 새삼스럽게 써놓았을 이는 없을 것이다. 약간 억지라 여겨질 위험을 안고라도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본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살아간다면, 비록 산다고 해도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육적으로 살아있다 하더라도, 살아있지 않다.’하는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다음에 나오는 ‘산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은 쉽게 풀린다. ‘지금까지 허상과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옛 내가 죽고 나의 참 나를 깨달아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새 삶을 사는 사람은 이제 육신적으로 죽어도 죽지 않는다.’ 대략 이런 말이라 풀 수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If you die before you die, you will not die when you die.)’는 말이 있지만, 이런 문맥에서도 실감나는 것 같다.

우리가 ‘죽은 것을 먹는 것은 죽은 것이 살아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앞서 제7절에서 ‘사람이 사자를 먹으면 사자가 사람이 된다’고 하는 말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깨침을 통해 새 사람이 되었을 경우 우리가 죽은 것을 먹어도 그 죽은 것이 우리의 생명에 새롭게 동참하므로 되살아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죽은 상태에 있던 옛 사람을 먹고 그것이 다시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본문은 우리가 빛 속에 거하면 무엇을 하겠는가 묻는다. 이 질문은 이제 빛 속에 거하게 되었으니 빛을 비추거나 나누어 주는 등 뭔가 행동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뜻으로도 풀 수 있고, 이제 빛 속에 거하게 되었는데 그 빛을 따를 뿐 다시 무슨 더 할 일이 있겠는가 하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양 쪽 모두 가능한 해석이다. 첫째 해석은 종교적 체험에는 반드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는 등 동료 인간들을 위한 행동이 뒤따르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고, 둘째 풀이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가지게 된 사람은 자기가 나서서 설치는 대신 자기는 그저 ‘도구’로 쓰일 뿐 나서서 설치는 일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위(爲)’를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과 맞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모두 가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어서 우리가 ‘하나였을 때 둘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둘이 되면 무엇을 하겠는가 다시 묻는다. 그 당시 사상계를 풍미하던 우주론(cosmology)에 기반을 둔 이야기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고대 사상가 상당수는 태초에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하나’가 있었는데, 이 하나가 분화되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만물이 되었다고 보았다. 이제 완전했던 하나가 둘이 되어 불완전 상태로 떨어졌으니 너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뇨 하고 물어보는 것이라 풀 수 있다. <도덕경>에도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았다”고 하는 분화과정을 이야기하고 있고(42장), 우리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면 고요와 쉼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12장). 신 플라톤 철학에서도 이 현상세계는 ‘하나(hen, 一者)’에서 유출(流出)되었고, 지금 이 상태에서 우리가 할 것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라 본다. 본문에서 ‘무엇을 하겠느냐’ 물어보는 것은 이렇게 ‘둘’이 된 비본연의 상태에서 ‘본래의 순일성(Primordial Symplicity)으로 돌아가라’,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라’, ‘원시반본(原始返本)’하라고 촉구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도덕경>에도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40장)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12절
의인 야고보에게 가야
- 새 지도자의 출현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떠날 줄 알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지도자가 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의인 야고보에게 가야합니다. 하늘과 땅이 그를 위해 생겨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르되,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떠날 것을 아나이다. 누가 우리를 인도하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디에 있든지, 의인 야고보에게 가야하느니, 천지가 그를 위해 생겼음이라.”

풀이: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다. 초대 교회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바울이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었다. 이 절에서는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안 계시면 그 후계자로서 야고보에게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하기 때문인가. 제13절에 보면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하늘과 땅’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행정적인 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야고보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가장 깊은 경지에 이른 것은 도마라고 하며 야고보와 도마를 대비시키고 있는 셈이다.

제13절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도마의 침묵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비교하여 내가 누구 같은지 말해 주시오.”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의로운 사자(使者)와 같습니다.” 마태가 그에게 대답했습다. “당신은 지혜로운 철인과 같습니다.” 도마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내 입으로는 당신이 누구와 같다고 전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네의 선생이 아닐세. 자네는 내게서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고 취했네.” 그리고는 예수님이 도마를 데리고 물러 가셔서 그에게 세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마가 자기 동료들에게 돌아오자 동료들은 그에게 물었다. “예수님이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셨는가?” 도마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하신 말씀 중 하나라도 자네들한테 말하면 자네들은 돌을 들어 나를 칠 것이고, 돌에서 불이 나와 자네들을 삼킬 것일세.”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비교하여 내가 누구와 같은지 말해 보아라.”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답하되, “당신은 의로운 사자(使者)와 같으시니이다.” 마태가 그에게 답하되, “당신은 지혜로운 철인과 같으시니이다.” 도마가 그에게 이르되, “선생님, 저의 입으로는 당신이 누구와 같으신지 전혀 말할 수가 없나이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나는 너의 선생이 아니라. 너는 내게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고 취했구나.”
그리고는 예수께서 도마를 데리고 물러 가셔서 그에게 세 가지 말씀을 하셨더라. 도마가 자기 친구들에게 돌아오자 저들이 저에게 물어, “예수님이 너에게 무슨 말을 하시더냐?” 도마가 저들에게 이르되, “저가 내게 하신 말씀 중 하나라도 너희에게 말하면 너희는 돌을 들어 나를 칠 것이요, 그 돌에서 불이 나와 너희를 삼키리라.”

풀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같은 이야기가 공관 복음서에도 나온다.(막8:27-30, 마16:13-20, 눅9:18-21).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여기 <도마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공관복음서에는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하는 고백만 있을 뿐 ‘도마의 침묵’이 없다는 점이다.

중국 선불교 전통에 속하는 <육조단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소림사에 머물며 면벽(面壁) 참선을 한지 9년이 지난 다음 거기를 떠나려고 하면서 제자들을 불러 놓고 각각 그동안 깨달은 바를 말해 보라고 한다. 한 제자가 나와서 뭐라 하자, 달마는 “너는 내 살갗을 얻었구나.”한다. 다음 제자가 나와 또 뭐라고 하자, “너는 내 살을 얻었구나.”한다. 또 다른 제자가 나와 뭐라고 하자 “너는 뼈를 얻었구나.”한다. 드디어 그의 수제자 혜가(慧可)가 나와 스승에게 경건하게 절을 올린 다음 가만히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달마는 그를 보고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구나.”했다. 깨달음에도 정도차가 있고, 구경의 깨달음에 이르면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여기 <도마복음>에서도 도마가 진리는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침묵을 통해 웅변적으로 말한 셈이고, 이를 통해 그의 ‘생수로 인한 술 취함’ 혹은 깨침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는 너의 선생이 아니라”고 한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중국 고전 <장자>에 보면 공자의 제자 안회가 공자에게 찾아 왔다. 이런 저런 말로 자기의 수행이 깊어지는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공자는 거기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다가 안회가 자기는 좌망(坐忘), 앉아서 모든 것을 잊었다고 하니 공자가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안회가 모든 앎을 몰아내고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하자 공자는 안회를 보고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하는 부탁을 한다(오강남 풀이 <장자> 313-316).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는 당신의 선생이 아니오.”하는 말도 이런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4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달력의 나이와 관계없이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바로 선생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깊은 경지에 이른 도마, 여기 표현대로 예수님이 주는 물을 마시고 완전히 ‘취한’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일 필요가 없고, 깨달음에 있어서 이제 둘은 동격임을, 그의 이름 그대로 ‘쌍둥이’임을, 선언한 셈이라는 것이다. 제108절에도 “내 입에서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되고 나도 그와 같이 됩니다.”고 했다. 도마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기에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나가 그에게만 특별한 비법을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이 도마를 따로 불러 일러주었다는 그 비밀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는 언급은 없지만, 다른 제자들처럼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무엇, 심지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고 혼란스러운 무엇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궁극 진리란 상식의 세계, 당연히 여겨지는 세계를 뛰어넘는 역설(逆說)의 논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덕경>에 보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다”(41장)고 했다. 진리를 듣고 돌로 쳐 죽이려는 것과 크게 웃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만 아무튼 진리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엄청 말이 안되는 무엇이라는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서는 같다. 제2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진리를 들으면 우선 ‘혼란스러워’ 지는 법이다.

참고: <요한복음>은 세 번씩 도마를 믿음이 없는 제자, 따라서 바람직하지 못한 제자로 묘사하고 있다(요11:16, 14:5, 20: 24). 요한복음이 쓰이어질 당시 도마복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에 이들을 반박하기 위해 도마를 격하시키고 폄훼하는 이야기를 삽입한 것이 아닌가 보는 학자도 있다. 아무튼 요한복음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이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2천년 가까이 도마는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로 알려지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궁극진리 앞에서 침묵하는 이가 도마로 되어 있지만, 최근에 세상에 알려진 <유다복음> 2:22-31에 보면 그것이 ‘유다’로 나와 있다. 도마든 유다든 중요한 것은 궁극진리는 언설로 표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다.

제14절
금식을 하면
- 형식적 종교의 종언(終焉)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금식을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죄를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 여러분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제를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을 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지방으로 가서 고을을 지날 때 사람들이 여러분을 영접해 들어가면 그들이 대접하는 대로 먹고 그들 중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십시오. 결국 여러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러분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여러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금식하면 너희는 너희 스스로에게 죄를 가져올 것이라. 너희가 기도하면 너희는 정죄 받을 것이라. 너희가 구제하면 너희는 너희 영을 해하게 되리라. 너희가 어느 지방으로 가서 고을을 지날 때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해 들어가면 저들이 대접하는 대로 먹고 저들 중 병자들을 고쳐주어라. 결국 너희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너희를 더럽히는 것이니라.”

풀이: 첫 부분은 제6절에 제자들이 금식, 기도, 구제에 대해 물어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에 해당된다. 그러나 바로 앞 절에 예수님이 도마를 따로 불러 말씀하신 세 가지 말씀이라는 것이 여기 금식, 기도, 구제에 관계되는 말씀이 아닌가 짐작할 수도 있다. 아무튼 금식, 기도, 구제, 이 세 가지는 유대교의 핵심적인 종교 행위였는데,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이런 외형적 종교 형식을 배격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기도했던 것으로 보아 금식이나 기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제도화된 종교에서 형식적으로나 가식적으로나 기계적으로 하는 그런 관행으로서의 금식, 기도, 구제를 거부하신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천국의 비밀, 감추어진 나라, 하느님을 찾고 나를 찾아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무엇이 모자라 다시 형식적으로, 의례적으로 죄를 회개하는 금식,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순종의 표시로 하는 구제 등이 필요하겠는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에 매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 하느님을 잃어버린 상태, ‘죄 받고, 정죄 받고, 상한 영’의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그 상태로 되돌아가 있다는 뜻이라 보고 있다. 당당히 율법주의적·형식적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대도(大道)가 페하면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나선다.”고 했다. 그렇게 되어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된다.”고 하였다(제18장).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금식이나 기도나 구제, 그리고 유교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하는 인의(仁義) 같은 외형적 가치가 여전히 중요시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아직도 그 사회가 종교에서 이상으로 하고 있는 구경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이야기이다.

둘째 부분은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을마다 찾아가, 대접하는 대로 먹고, 병자를 고쳐주는 등 어떻게 활동했던가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대접하는 대로 먹어라’는 것이다. 바로 앞 구절에서 금식, 기도, 구제 등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 종교를 청산하라는 파격적인 말과 함께, 여기 이 말은 더욱 구체적으로 성서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음식물 규례에 따라 음식을 철저히 가려 먹는 유대인들의 결벽(潔癖)주의적 ‘정결제도(purity system)’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초기 불교에서도 불가에서 채식을 기본으로 했지만 무엇이나 주는 대로 먹는다는 것을 대 원칙으로 삼았다.

왜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가? 여기서 드는 가장 큰 이유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마음에서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 더욱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삶에서 보다 중요한 관심사는 먹는 것 이상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가장 중요시되던 정결제도를 무시하여 유대인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예수님에게 중요하던 것은 얼마큼 깨끗하냐 하는 것보다 얼마큼 자비스러운가 하는 것이었다.(이 ‘정결제도’에 대해서는 오강남 <예수는 없다>, pp. 228-234를 참조할 수 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음식 가려 먹기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대로 건강에 좋은 음식, 적절한 음식을 가려먹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이 음식이 내 건강에 끼치는 직접적인 영향보다도 이 음식이 내 건강에 좋은가 나쁜가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는 것이 건강에 더욱 나쁠 수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극단의 예를 들어 건강상 술을 마시면 안 될 사람이 술을 마시면 물론 술이 몸에 해롭겠지만, 이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과 죄책감과 좌절감 같은 것이 술이 인체에 직접적으로 끼치는 생물학적·영양학적 악영향 못지않게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 여자들 중 몸무게가 나가는 것이 겁이나 음식을 기피하다가 음식을 아주 먹지 못하는 거식증(拒食症, anorexia)에 걸려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기까지 한다. 요즘 새로 생긴 조어로 orthorexia 라는 것이 있다. ‘ortho’라는 것이 orthodox(正統), orthodontics(치아교정)에 보이는 것처럼 ‘바름(正)’을 뜻하는 것이니, ‘정식(正食症)’이라고 할까? 건강에 좋은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먹은 음식이 소화도 안 되고 잘못된 음식을 한 젓가락이라도 먹었으면 그것 때문에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종교적 계율에 어긋나 하늘나라에도 못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그러느라 결국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경우에 적용하는 말이다.

종교적 이유로든 건강상의 이유로든 먹을 것이나 못 먹을 것을 극단으로 따지는 사람과 식사를 해 보라. 밥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웃음도 나누고 해야 할 시간에 이것 먹으면 안 된다,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 이것이 좋다 뭐다 하는 잔소리나 건강 강의를 듣느라 그야말로 밥맛이 달아나고 밥 먹는 기쁨도 없어져 버린다.

이런 것이 유대교의 형식주의 신앙에서 강요하는 음식 가려먹기의 결과라면 그런 신앙은 우리의 육체적, 영적 건강을 해치는 일을 하는 셈이 아닌가. <도마복음>의 예수님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 이런 것 이상임을 말하고 있다. 무엇이나 감사하며 맛있게 먹을지어다.

이 14절에서 우리는 종교가 깊이를 더하면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인습적이고 관행적인 것에 억매이지 않는 파격성, 뒤집어엎음, 우상타파(iconoclasm) 등의 특성을 나타낸다는 역사적 사실의 실례를 보게 된 셈이다.

눅10:8-9, 막7:15, 마15:11 참조

제15절
여자가 낳지 아니한 사람을 보거든
- 불로 난 사람의 위대함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자가 낳지 아니한 사람을 보거든 엎디어 경배하십시오. 그 분이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여자가 낳지 아니한 자를 보거든 엎디어 경배하라. 그가 바로 너희 아버지임이라.”

풀이: 모든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모두 여자로부터 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혹은 불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여자로부터 난 사람이 아니다. 제2 혹은 제3의 탄생은 생물학적·육체적 태어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 남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와 하나 된 사람, 그러기에 그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의 경배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마11:11)고 했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 세례 요한이고 천국에 있는 이들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라고 했는데, 여기 <도마복음> 제15절에는 아예 이런 사람들은 여자가 낳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위대하게 보여도, 심지어 세례 요한처럼 위대한 종교 지도자까지도, 결국 영으로 태어난 사람, 불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석가님도 여러 해 수행을 하여 부처님이 되는 성불의 체험을 했다. ‘성불(成佛)’이란 어원적으로 ‘깨침을 이룸’ 혹은 ‘깨친 이가 됨’이란 뜻이다. ‘불’ ‘부처’ ‘붓다’는 모두 ‘깨친 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깨치는 경험을 하고도 세상일에 집착하고 있는 일반 사람들이 자기의 가르침에 주목이나 할까, 주목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의심하면서, 사람들에게 나가서 자기가 깨친 진리를 전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그 당시 최고신의 하나인 브라마(Brahmā, 梵天) 신이 내려와, 그에게 경배하며, “세존이시여, 진리를 가르쳐 주소서. 수가타시여, 진리를 가르쳐 주소서. 눈에 티끌이 덜 덮인 중생들 중 진리를 듣지 못해 떨어져 나갈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진리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M.26)고 하며 세 번씩이나 간원한다. 불교에서 ‘깨친 이’는 천상의 신도 경배할 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불교’라는 말 자체가 ‘깨침을 위한 종교’라는 뜻임을 감안할 때 이런 일은 어느 면에서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제16절
이 땅에 분쟁을
- 운명적 단독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과 전쟁을 주러 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설 것입니다. 모두가 홀로 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거니와, 저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모르고 있느니라.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니, 모두가 홀로 서리라.

풀이: 문자적으로, 표피적으로 읽고, 예수님을 따르면 실제로 칼을 들고 싸움을 하고 모든 식구들과 불화하고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아무튼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여기 <도마복음> 뿐 아니라 성경에 있는 공관복음서에서도(눅12:51-53, 마10:34-36) 예수님이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을 주러 오셨다고 하는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14:27)고 했다. 평화에도 예수님이 주는 바람직한 평화와 세상이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 두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바람직한 평화는 정의가 강같이 흐를 때, 모든 사람들이 서로 오순도순 사랑하고 도와주며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는 밝고 따뜻한 참된 평화요,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주거나 억눌러도 말 한마디 못하는 상태, 불의를 보고도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눈감거나 동조할 수밖에 없을 때 있을 수 있는 무겁고 싸늘한 외형적 평화다. 첫째 종류의 평화는 우리가 추구하고 유지해야 할 것이지만, 둘째 종류의 평화는 단연히 배격하고 깨뜨려야 한다. 한 가지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어느 살인마가 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와 교정에서 놀고 있던 어린 아이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하고 있다고 하자. 이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만 서 있는 것이 평화일 수 있겠는가.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평화가 세상에 만연할 때를 상상해 보라. 예수님 당시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하는 것은 로마의 절대 철권 아래서 모든 민족이 꼼짝 못하고 있을 때만 가능했던 이런 식 죽음의 평화다. 예수님은 스스로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 이런 식의 평화를 종식시키려 오셨다고 선언한 것이 아닐까.

둘째,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은 새로운 안목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상식의 세계에서 보는 사람들과 의견이 같을 수가 없다. 앞에서 몇 번 지적한 것처럼, 깨달은 사람들이 갖는 공통성 중 하나가 바로 고정관념이나 일상적 통념을 ‘뒤집어엎음(subversiveness)’이 아니던가.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우상처럼 받들고 거기 사로잡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수밖에 없다. 나아가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 사이에서마저도 그 깨달음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이른바 ‘단독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단독자 됨, 홀로 섬, 고독은 종교사를 통해 볼 때 선각자가 당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자기 멍에는 가볍고, 자기를 따르면 쉼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셨다’고 했다(눅19:41). 노자님도 자기 말은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쉽지만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이렇게 드믄가’(<도덕경> 70)하고 탄식했다. 공자님도 ‘아,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늘밖에 없구나’ (<논어> 14:37)하고 한탄했다. 위대한 성인들의 실존적 고독을 말하는 대목이다.

마지막 구절 ‘홀로 서리라’는 여기 외에도 18, 23, 28, 50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이 ‘홀로’의 그리스어 ‘monachos’에서 서양말에서 독신 수도사를 뜻하는 ‘monk’와 수도원을 뜻하는 ‘monastery’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모여 살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단독자일 수밖에 없고, 이런 단독자들의 모임이 수도회라는 뜻인가 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영적으로 앞서 간 사람들이 홀로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떠나 홀로만 살게 된다고 하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경> 4장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이 나온다. 빛이 부드러워져 티끌과 하나 된다는 뜻이다. 성인들, 곧 깨친 사람들은 언제까지 고고하게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빛을 부드럽게 함으로 일반 사람들과 섞이어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빛이 티끌과 하나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한다는 ‘임마누엘’ 혹은 ‘육화(肉化, incarnation)’의 논리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에도 소년이 소를 찾아 홀로 집을 떠나 소를 찾지만 찾은 다음에는 다시 저자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그 마지막 그림이 아니던가.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서 자주 말하는 ‘절대적 단독자를 향한 단독자의 비상(the flight of the alone to the Alone)’이 이루어짐으로 얻을 수 있는 평화, 이 평화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으로 다시 사람들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이리라.

제17절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 신비의 선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했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못했던 것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너희에게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귀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했고, 마음에 떠오르기도 못했던 것을 주겠노라.”

풀이: 히브리어 성경 이사야에 “이런 일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64:4)하는 말이 있고,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께서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를 두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고전2:7-9)이라고 했다.

노자의 <도덕경> 14장에서도, 도(道)를 두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夷),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希),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微)이라고 했다. 초기 중국으로 간 서양 선교사들 중에는 이 세 글자가 ‘여호와’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하고 흥분한 적이 있다. 아무튼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도 바울이 말하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나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처럼 인간의 일상적 감각이나 지각으로는 감지될 수 없는 궁극 진리를 뜻한다.

그런데 <요한1서>1:1에는 이와 반대로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고 했다. 진리는 감추어져 있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여기 요한 서신에서는 이처럼 우리가 듣고 보고 지켜보고 만져보기까지 한 것이라고 하는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관건은 예수님이 주시는 ‘깨달음’을 통해서이다. 성경의 용어를 빌리면 ‘성령’으로 눈이 뜨이는 것, 들을 귀가 열리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드러나 있다. 그러기에 신(神), 혹은 궁극실재는 감추인 면(deus absconditus, 감추어진 신)과 드러난 면(deus revelatus, 계시된 신),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이처럼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도록 감추어진 것을 ‘주겠다’고 한 것은 결국 우리에게 깨침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이다. 이런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핵심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8절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 시종(始終) 불이(不二)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끝이 어떻게 임할 것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시작을 찾았기에 이제 끝을 찾습니까?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시작에 서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끝을 알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끝이 어떻게 임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시작을 찾았기에 이제 끝을 찾느냐?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느니라. 시작에 서 있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는 끝을 알고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임이라.”

풀이: 제자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아버지의 나라는 언제 어떻게 올 것인가 하는 등 종말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지적한 대로 여기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들도,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세상 끝이 곧 올 것이라는 것, 초자연적인 메시아의 나라의 도래가 임박하다 것 등을 전제로 하는 이른바 ‘철저적 종말론(thorough-going eschatology)’의 입장에 서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렇게 미래에 올 종말이나 하느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 한 제자들의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시작도 모르면서 끝을 알려고 하느냐?’ 하는 식의 나무람이다. 이어서 끝은 시작이 있는 곳에 있으니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다. 시작을 알면 저절로 끝도 알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죽음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거의 모든 세계 신비주의 전통에서 지적하는 것과 같이, 시작과 끝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시작이 없는 끝도 있을 수 없고 끝을 전제로 하지 않은 시작도 있을 수 없다. 시작과 끝은 상호 불가분·불가결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출발이 없는 도착도 있을 수 없지만 도착이 없는 출발도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상호 의존, 상호 침투의 관계를 두고 화엄불교에서는 상즉(相卽)·상입(相入)의 관계라고 한다. 깨치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조삼모사’ 이야기의 원숭이들처럼 시작이나 끝을 따로 분리해서 어느 한 쪽만을 보려고 한다. 제자들의 태도가 바로 이랬기에 예수님은 꾸짖으신 것이다. 시작에서 끝을 보라고. 알파와 오메가를 동시에 보라고.

여기서 ‘시작에 서 있으라’는 말은 사물의 분화가 있기 이전, 창세기에 나오는 그 창조의 첫날 이전, 그 태고(太古)의 시원(始原)으로 돌아가라는 말로 읽을 수도 있다. 만물의 근원인 그 본래의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목표의 완성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로 보아도 좋다. 신유학(新儒學)에서는 만물이 분화한 ‘이발(已發)’의 상태와 그 이전 아직 아무 것도 분화하지 않은 원초적 ‘미발(未發)’의 상태를 분간하는데, 이 절에서 말하는 ‘시작’이라는 것이 미발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도덕경>에서도 “세상만사에는 시작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를 알면, 그 자식을 알고, 그러고도 그 어머니를 받들면, 몸이 다하는 날까지 위태로울 것이 없습니다.”(52장)고 했다. 만물의 어머니이며 시작인 도(道)를 알면 현상 세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 다시 근원인 도(道)로 돌아가 도와 하나 된 삶을 살면, <도마복음>식 표현대로,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종파들 중 상당수는, 여기 나오는 제자들처럼, 세상의 ‘종말’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 왔고, 아직도 기울이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정확하게 몇 년 며칠에 세상 끝이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거나 주장하기도 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은 대부분 ‘카이로스(kairos)’로서 달력으로 따지는 연대기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상관이 없다. 카이로스를 구태여 옮긴다면 timing이라는 말에 가깝다. ‘호기(好期)’ ‘적기(適期)’와 비슷하다. 아무튼 이 절이 가르쳐주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시원(始原)’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19절
있기 전에 있는 사람은 행복
- 불변의 비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있기 전에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면 이 돌들이 여러분을 섬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낙원에 준비된 다섯 그루 나무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변하지 않고, 그 잎도 떨어지기 아니 합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있기 전에 있는 자는 복이 있으니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면 이 돌들이 너희를 섬기리라. 너희들을 위해 낙원에 다섯 그루 나무가 예비되었으니, 이것들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변하지 않고, 그 잎도 떨어지기 아니 하느니라. 이를 깨닫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풀이: ‘있기 전에 있음’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있음’에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있음의 근원으로 존재하는 그 원초적 근원으로의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원초적 근원으로서의 있음이 분화되어 여러 가지 현실적 형태로 나타나 있는 현실 존재로서의 있음이다. 이 원초적 있음을 중세 사상가들은 ‘순수 존재(esse purus)’라 표현하기도 했고 유영모 선생님은 ‘없이 있음’이라 하기도 했다. 이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현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이 우리의 근원, 모든 ‘존재의 바탕(ground of being)’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원초의 하나와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대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이런 경험을 구체적으로, 시적으로,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귀향’ ‘화해(reconciliation)’ ‘재회(reunion)’ ‘구속(at-one-ment)’ 등이다. 아니, ‘종교(religion)’라는 말 자체가 이렇게 근원으로부터 떨어졌던 내가 거기에 ‘다시 결합’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3세기 락탄티우스(Lactantius)처럼 라틴어 ‘religio’가 어원적으로 ‘re-legare(다시 결합하다)’에서 나왔다고 보는 이도 있었으니까.

아무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여기 말한 것처럼 ‘있기 전의 있음’에 거하는 사람,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돌들의 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처럼, 여름이든 겨울이든 변하지 않고 잎도 떨어지지 않는 푸른 나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돌들이나 나무들 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합동하여 유익함’을 제공한다. 모든 것에서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으로 우뚝 선다. 이렇게 ‘있기 전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영적 사활을 좌우한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강조한다.

제20절
그 나라는 겨자씨와 같으니
- 작은 것의 가능성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나라가 어떠할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겨자씨와 같으니, 모든 씨들 중 지극히 작은 것이나 준비된 땅에 떨어지면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가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이르기를, “나라가 어떠할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소서.”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것은 겨자씨와 같으니, 모든 씨들 중 지극히 작은 것이나, 예비된 땅에 떨어지면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가 되리라.” 하더라.

풀이: 우리 속에 잠재적 상태로 있는 변화의 씨앗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것이 적절한 때(kairos)를 맞으면, 혹은 인연(因緣)을 얻으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준다. 이런 변화의 엄청남을 시각적 크기로 표현한 것이 겨자씨가 큰 숲이 된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중국 도가(道家)의 고전 <장자> 첫 장 첫머리에 보면 ‘붕(鵬)’ 새 이야기가 나온다. 북쪽 깊은 바다에 작은 물고기 알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물고기가 되고 그것이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는 큰 물고기로 변하고, 또 그것이 다시 등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붕새로 바뀌어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라 남쪽 ‘하늘 못’으로 가는 붕정(鵬程)에 오른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속에 있는 조그마한 가능성의 씨알이 엄청난 현실로 바뀔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결국에는 대붕의 비상(飛翔)이 상징하는 초월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비유이다.(오강남 풀이 <장자>(현암사, 1999) 26-27참조)

세계 여러 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이런 ‘변화(transformation)’의 체험이다. 그래서 비교종교학자 프레데릭 스트렝(Frederick J. Streng) 같은 사람은 ‘종교’를 두고 ‘궁극적 변화를 위한 수단(a means to ultimate transformation)’으로까지 정의했다.(그의 책 Understanding Religious Life, 3rd edition(1985), p. 2.) 그리스도교에서 새 사람이 된다, 거듭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하는 말이나, 불교에서 성불한다, 부처님이 된다는 말이나 유교에서 소인에서 군자나 성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모두 이런 변화를 각각의 전통에 따라 다른 각도, 다른 표현으로 말한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궁극 실재를 봄, 깨달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세상을 보면 이전의 개구리가 아니라 다른 개구리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이치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면 (생물학적으로 겨자는 일년생 풀로서 나무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무튼 크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런 변화를 경험하게 된 당사자에게만 훌륭한 일일 뿐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들의 쉼터’를 제공해 줘서 주위에도 좋은 것이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유교 경전 <대학(大學)>에도 보면 ‘큰 배움[大學]’은 여덟 가지 단계로 구성되었는데, 그것은 사물을 궁구하고[格物], 깨달음을 극대화하고[致知],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인격을 도야하고[修身], 가정을 살피고[齊家],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궁극적으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平天下]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배움의 단계 중 처음 다섯 단계는 자신의 변화를 위한 노력이지만 나머지 세 단계는 가족과 이웃과 세계를 위해 도움을 주는 일이다. 앞에 나온 16절 풀이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에서도 깨달음을 찾아 집을 떠나는 첫째 그림부터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변화를 얻은 다음 마지막으로 오는 열 번째 그림은 남을 돕기 위해 저자거리로 나가는 그림이다. 신비적 경험을 통해 변화된 사람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임을 말해주는 몇 가지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깨친 사람들이 사회에 무슨 도움을 주게 된다고 하여 반드시 직접 나서서 부산을 떨고 설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그들을 보고 사회에서 분리되어 고고하게 스스로의 평화만을 즐기는 도피주의자들이라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설령 깨친 사람들이 사회에 직접 뛰어들어 우리 눈에 뜨일 만큼 큰일을 이루어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의 공헌을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모두가 쓸데없이 부산을 떨며 흙탕물을 일으키는 이 혼탁한 세상에서 깨친 사람들만이라도 우선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만큼 사회가 덜 혼탁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장자>에 나오는 요 임금이 고야 산에 사는 네 명의 신인(神人)들을 찾아가 뵙고 돌아오는 길에 분(汾)강 북쪽 기슭에 이르자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는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깨친 사람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요 임금 같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나라를 그만큼 좋게 만드는 데 공헌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깨친 사람들은 모든 것과 하나 된 상태에서 만물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려 물 흐르듯 흐르기 때문에 구태여 뭔가 한다고 나서서 설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위(無爲)의 상태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면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알프스 산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쏘다니지 않고도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동네 정자나무가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그늘에서 쉼을 얻는다.

제21절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어린 아이들과 같아
- 귀향(歸鄕)

마리아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무엇과 같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어린 아이들과 같습니다. 땅 주인들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땅을 되돌려 달라’ 하니, 그 어린 아이들은 땅 주인 있는 데서 자기들의 옷을 벗고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 줍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합니다. 만약 집 주인이 도둑이 올 것을 알면 그 주인은 도둑이 오기 전에 경계하여 그 도둑이 집에 들어와 소유물을 훔쳐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세상에 대해 경계하십시오. 힘 있게 준비하여 도둑이 여러분 있는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예상하는 어려움이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깨닫는 이가 있도록 하십시오. 곡식이 익어 거두는 자가 손에 낫을 가지고 속히 임하여 이를 거둘 것입니다. 두 좋은 귀 있는 사람들은 들으십시오.”
-- 마리아가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은 무엇과 같으니이까?”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저들은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노는 어린 아이들과 같도다. 땅 주인들이 와서 이르되, ‘우리 땅을 되돌려 달라’ 하니, 그 어린 아이들은 땅 주인 있는 데서 저들의 옷을 벗고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 만약 집 주인이 도둑이 올 것을 알면 그 주인은 도둑이 오기 전에 경계하여 그 도둑이 집에 들어와 소유물을 훔쳐가지 못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에 대해 경계하라. 큰 힘으로 준비하여 도둑이 너희를 노략질 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기다리는 환란이 이를 것을 인함이라. 너희 중에 깨닫는 자가 있도록 하라. 곡식이 익으매 거두는 자가 손에 낫을 가지고 속히 임하여 이를 거두리라. 두 좋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풀이: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마르다의 자매 마리아 등 마리아가 많이 등장한다. 여기서 어느 마리아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영지주의 복음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마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참된 깨달음도 없는 사람들로 취급되고 있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그런 제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제자들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장면을 우리말에 더 익숙한 말로 고치면, 그 아이들이 남의 집 마당 같은 공터에서 놀고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다가 집 주인이 와서 이제 나가라고 했다. 아이들이 주인 앞에서 옷을 벗고 그 집 마당에서 물러섰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속하지는 않았던 세상’, 영어로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로 표현되는 이 세상을 떠나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 침례를 받고 새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암시한 것일 수도 있다. 또 영지주의나 그리스 사상 전반에 걸쳐서 주장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몸을 입고 남의 집 마당 같은 이 세상에 잠시 놀러 와서 재미있게 놀다가 때가 되면 다시 몸을 벗고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라 할 수도 있다. 시인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의 마지막 구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를 연상하게 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잠시 와서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이다. 재미있게 놀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 우리보고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나가라고 하면, 더욱이 어머니가 해가 지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가라고 하니 그냥 떠나갈 뿐 아니라 옷까지 다 벗어 두고 간다. 그야말로 적수공권이다. 이 세상에 놀면서, 살면서 가지고 있던 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안 얻은 모든 소유나 권력이나 명예나 지식 같은 것이 모두 거추장스러운 헌 옷이다. 미련 없이 모두를 뒤로 하고 떠나가는 것이다. 떠나서 우리의 원초적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귀향(歸鄕)이요 귀일(歸一)이다.

이 절에서 여기까지는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도둑’ 이야기가 나오고 도둑이 올 것을 알고 경계하여 소유를 잃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가. 성서 복음서에서도 ‘도둑’ 이야기가 나온다(마24:43, 눅12:39). 그러나 거기에는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시키고 있다.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재림 이야기가 전혀 없다. 그럼 무엇인가?

여기서 도둑에게 우리 소유물을 잃을까 경계하라는 말을 이 세상이라는 남의 땅에서 놀던 아이들이 땅도 돌려주고, 옷도 버리고 다시 돌아가 찾은 아버지의 나라, 그 고향을 세상사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관심 때문에 도로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으로 풀 수 있을 것 같다. 한번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안심할 수가 없다. 언제나 그것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잃는 어려움, ‘환란’에 대비해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에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힘쓰라. 그러면 ‘큰 수확’이 있으리라. 대략 이런 기별이 아닐까.

제22절
젖 먹는 아이를 보시고
- 양극의 조화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젖 먹는 아이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하고, 속을 바깥처럼, 바깥을 속처럼 하고, 높음 것을 낮은 것처럼 하고,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고, 새 눈을 가지고, 새 손을 가지고, 새 발을 가지고, 새 모양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젖 먹는 아이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도다.” 제자들이 그에게 일러,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삽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둘을 하나로 하면, 속을 바깥처럼, 바깥을 속처럼 하면, 높음 것을 낮은 것처럼 하면,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면, 새 눈을 갖고, 새 손을 갖고, 새 발을 갖고, 새 모양을 갖게 되면, 그러면 너희는 그 나라에 들어가리라.”

풀이: <도마복음>의 핵심과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절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제4절에 늙은이라도 갓난아기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젖먹이 갓난아기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 복음서에 보면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올 때 제자들이 이를 꾸짖자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 마19:14, 눅18:16)고 하셨다. <도마복음>과 다른 점은 여기 공관복음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갓난아기라는 언급이 없다. 우리가 흔히 보는 그림으로나 듣는 이야기로 우리는 예수님의 무릎에 앉은 어린이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니는 정도의 어린이들로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그것이 젖을 먹고 있는 갓난아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공관복음서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천국 가는 이유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태복음>에 보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18:4)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자기를 낮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다는 말이 없다. <도마복음>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으로서 ‘젖먹이 갓난아기 같이 됨’이라고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이 젖먹이 갓난아기들이야 말로 ‘둘을 하나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생각은 4절, 22절에 나왔고, 23절, 48절, 106절에도 계속 나온다. 무슨 뜻인가?

첫째, 물리적으로 갓난아기는 남성의 아버지와 여성의 어머니 ‘둘이 하나가’ 되어 생긴 결과다. 그 아이도 나중에는 남성이나 여성이 되겠지만 아직 할례도 받기 전의 갓난아기는 남녀로 분화되지 않은 하나의 상태, 합일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반대 같이 보이는 것을 한 몸에 합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으로 아이는 아직 나와 대상을 분간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는 상태다. 주객(主客)이 분화되지 않았다. 이런 의식 상태에서는 ‘내외(內外), 상하(上下), 고저(高低), 자웅(雌雄)’ 등 일견 반대되고 대립되는 것 같은 것을 반대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조화와 상보의 관계로 볼 수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갓난아기의 특성으로서, 이런 특성을 가져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태극기 가운데 붉은 색과 파랑색으로 된 태극의 음양(陰陽)에서 음과 양의 관계를 말할 때 음이냐 양이냐 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 이항대립(二項對立) 대립 식 ‘냐냐주의’(either/or)의 시각으로는 실재의 진면목을 볼 수 없고, 음이기도 하고 양이기도 하며 동시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는 ‘도도주의’(both/and, neither/nor)적 태도를 가질 때 사물의 전체를 본다고 한다. 음과 양을 독립된 두 개의 개별적 실체로 보지 않고 한 가지 사물의 양면으로 파악다는 다는 뜻이다. 이것을 요즘 말로 고치면 ‘초이분법적 의식(trans-dualistic consciousness)’을 갖는 다는 것이고, 좀 더 고전적인 말로 하면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니콜라우스(Nicolas of Cusa, 1401-1464)가 말하는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발견하는 것이다.

<도덕경> 28장에 보면 “남성다움을 알면서 여성다움을 유지하십시오. 세상의 협곡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협곡이 되면, 영원한 덕에서 떠나지 않고, 갓난아기의 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고 했다. 이처럼 ‘갓난아기’됨의 중요성을 알기에 노자는 <도덕경> 20장에서 “나 홀로 어머니의 젖 먹음을 귀히 여긴다.”고도 했다. 또 제2장에는 선악, 미추, 고저, 장단이 모두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절대시하지 말라고 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사실 세계 여러 종교에서 ‘양극의 조화’처럼 중요한 개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양의 조화를 말하는 태극☯ 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위로 향한 삼각형과 아래로 향한 삼각형을 포개놓은 유대교의 ‘다윗의 별’(그림을 넣어 주세요.)이라든가, 수직선과 수평선을 교차시킨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나, 두 원을 아래위로 반반씩 겹쳐놓고 그 중 겹쳐진 부분을 잘라 만든 초기 그리스도교의 물고기(Ιχθυs,ΙΧΘΥΣ) 상징(그림을 넣어 주세요.), 불교 사찰에서 보는 만(卍)자 등이 모두 이런 양극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도 ‘양극의 조화’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심리적 성숙성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하고, 그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도 세계 모든 영웅 신화에 나오는 정신적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이 영웅들이 도달하는 최종의 경지는 이 ‘반대의 일치’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핵심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잃어버린 여성성을 되찾아 양극의 조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중세 기사(騎士)들이 찾아다니던 성배(聖杯)나 다빈치가 그의 그림 ‘최후만찬’ 중앙 예수와 그 옆 사람(댄 브라운은 그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본다) 사이에 만들어 놓은 공간이나 모두 V형으로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잃어버린 여성성을 상징하는데 기사들이나 다빈치 모두 이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초인격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의 선두 주자 켄 윌버(Ken Wilber)는 인간 의식의 발달 과정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주객미분(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 주객이분(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 그리고 주객초월(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단계가 있다고 했다. 아담 하와가 선악의 이분법적 의식을 갖기 이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할 줄 모르던’ 의식은 주객미분의 단계로서 바람직한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단계로 가려는 것은 전진이 아니라 퇴보라고 보았다. 주객이분의 의식, 인간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자의식(自意識, self-consciousness)’을 가능하게 함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이런 일상적 의식에서 해방되기 위해 술이나 약물 등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의식 상태는 주객 ‘미분’의 단계요, 종교에서 가르치고 목표로 하는 의식 상태는 주객 ‘초월’의 단계라는 것이다. 미분과 초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윌버는 ‘전초오류(pre/trans fallacy)라 했다. 갓난아기의 의식을 말할 때 우리는 육체적으로 다시 갓난아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영적인 갓난아기가 됨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했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객이분의 단계를 ‘초월’해야 됨을 말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주객미분의 단계로 ‘퇴영’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니고데모는 ‘미분과 초월’을 혼동하는 ‘전초오류’를 범한 셈이다.

이 절에서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했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벌써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 할 수도 있다. 이미 새로운 눈, 새로운 손, 새로운 발, 새로운 모습을 가지고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제106절에 보면 둘을 하나로 보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사람의 아들’이 되고 산을 보고 ‘움직이라고 하면 산이 움직일’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참고: <도덕경> 20장에 “나 홀로 뭇 사람들과 다른 것은 결국 나 홀로 어머니 젖 먹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어린 아이처럼 이분의 세계를 벗어났다는 뜻과 함께 어린 아이가 어머니 젖을 찾는 것처럼 도를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제23절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
- 깨달음의 어려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너희를 택하리니,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이라. 저들이 모두 하나로 서리라.”

풀이: 물론 여기서는 누구는 택함을 받고 누구는 택함을 받지 못 한다는 식의 예정론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천 명 중 한명’, 심지어 ‘만 명 중 두 명’ 꼴이라니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 보다 더 어려운 셈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7:13, 눅13:24)”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는 말씀과 같다.

힌두교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1) 깨달음의 길(jnana marga), 2) 헌신의 길(bhakti marga), 3) 행함의 길(karma marga)이다. 깨달음의 길이란 우주의 실재를 꿰뚫어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를 통해 해방과 자유에 이른다는 것이고, 헌신의 길은 어느 특정한 신이나 신의 현현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받드는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고, 행함의 길이란 도덕규범이나 규율을 잘 지키거나 남을 위해 희생적인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 길 모두 자기중심적 자아를 극복함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행하기에 상대적으로 어려운 길과 쉬운 길로 나누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은 가장 가파르고 어려운 길이라 상근기(上根器)에 속하는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길은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애(信愛)의 길이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 성불하겠다는 선불교의 길을 보통 ‘난행도(難行道)’라고 하고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토종의 길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물론 참선하겠다는 사람보다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불교의 경우 믿음을 강조하는 불자들이 비록 자기들은 깨침에 이를 수 없지만, 깨침을 강조하는 불자들을 우러러 보거나 존경할망정, 결코 이단이라 정죄하거나 박해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깨침을 얻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단이라 여길 뿐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정죄하고 박멸하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천국을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깨달음의 길은 그만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물론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 같은 문자주의자의 정치적 목적으로 <도마복음> 같은 복음서들을 모두 배격하고 4복음서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도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깨달음에 이르므로 모두 예수님처럼 자유의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도마복음> 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선물로 주는 영생을 얻으라고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길을 채택한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요한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식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앙의 깊은 차원을 알아볼 기회가 없던 일반인들에게 어쩔 수 없이 인기품목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옛날에는 비록 상근기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교육의 기회가 없어서 이런 ‘난행도’ 같은 것을 접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맹률이 97퍼센트 이상이던 고대 사회에서 누가 옆에서 말해주지 않으면 도마복음의 기별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나 필자도 한 두 세대 전에 태어났으면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이제는 들을 귀, 알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어 성경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2:28)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가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지적·영적 환경 속에서는 ‘가물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가마솥에 ‘콩 튀 듯’하리라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가톨릭 최대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달음을 강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오늘처럼 정보화된 시대에 교육의 기회도 많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특별히 박해받는 일도 사라진 21세기에는 종교가 무조건 믿어라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비적 경향성을 띠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그리스도교도 믿음과 함께 깨침을 함께 강조하는 폭넓은 종교로 변해야 하고, 이리하여 ‘무조건 믿으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아하!’를 연발하며 갈 수 있는 깨침의 길도 열려 있음을 알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천 명에 한 명이든 천 명에 백 명이든 깨침을 얻은 사람들은 제16절에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홀로’ 서게 되게 된다. 임금에 대한 충절이나 의로움을 위해 죽은 사육신 성삼문마저 ‘독야청청’할 수밖에 없었거늘, 영적 눈뜸을 경험한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참고1: “각 시대를 통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경외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고, 그가 원했던 것을 실천하려 한 사람은 더더욱 소수였다. 그의 말씀은 뒤틀리고 휘어져 무슨 의미로든지 마음대로 해석되거나 심지어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에게 겁주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을 영웅적 바보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남용되었다. 예수님은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욱 큰 영광과 경배를 받으신다. 더할 수 없는 아이러니는 그가 그 당시 세상에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일들이 되살아나서 온 세상에 퍼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Albert Nolan, Jesus Before Christianity: The Gospel of Liberation (London Darton, Longman and Todd, 1977), p. 3.)

참고2: 깨달음은 일생에 단 한번 오는 일생일대의 대사건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매일, 매순간 깨달음의 연속을 맛보며 신나게 사는 삶, 매사에서 죽음과 부활의 연속을 체험하며 사는 삶이라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옛 편견을 벗고 새로운 빛으로 들어서는 것. 산을 올라가며 점점 널리 전개되는 풍광을 내려다 보며 계속적으로 외치는 ‘아하!’ 경험, 바울이 말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경험이 모두 깨침의 경험이라 보는 것이 좋다.

제24절
당신이 계신 곳을
- 빛의 편재성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계신 곳을 저희에게 보여 주십시오. 저희가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이는 들으십시오. 깨달은 사람 속에는 빛이 있어,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춥니다. 그 빛이 비추지 않기에 어두움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계신 곳을 저희에게 보여 주소서. 저희가 찾아야 하기 때문이니이다.” 그가 이르시되,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깨달은 자 안에는 빛이 있나니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추노라. 그 빛이 비추지 않으면 어둠이 있으리라.”

풀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하자 도마가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하고 묻고, 이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14:1-6)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리석은 도마가 예수님의 말씀에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찌 ‘길’ 같은 것을 묻는가? 그걸 알아서 뭐하겠다는 것인가? 그저 길이실 뿐 아니라 진리요 생명이시기도 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지...하는 식이다. 앞 제13절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 가지로 요한복음에는 믿기보다는 깨침을 강조하는 도마를 ‘의심 많은 도마’ ‘어리석은 도마’로 폄훼하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그런데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이와 반대로 예수님이 계시는 어느 한 곳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 제자들이야 말로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빛 되신 그가 어느 한 곳에 한정되어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환한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일까 찾아 헤매는 대신, 귀를 열고 깨달음을 얻어, 예수님 자신 뿐 아니라 깨달은 사람 누구에게나 그 속에 빛이 있다는 것, 따라서 빛은 어디에나 다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대답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 속이나 우리 속에 있는 빛의 편재성(遍在性)을 강조하는 셈이다.

한편, 엄격히 말하면 물론 우리 모두의 속에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불꽃(a spark of God)’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통해 이 빛을 체득하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이 빛을 세상에 비추는 일이다. 내재적인 빛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세상이 밝고 어두운 것은 해나 달, 횃불이나 크리스마스 장식등 같은 것들의 유무와 상관없이 깨달은 사람 속에 있는 이 빛이 세상을 비추는가의 여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을 ‘세상의 빛’(8:12, 9:5, 12:46)이라 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달리 <도마복음>은 예수님만 세상의 빛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깨닫기만 하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빛임을 알게 될 것이라 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요한복음>이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면, <도마복음>은 빛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도 빛임을 깨닫고 이를 비추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도 그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 결국은 우리도 빛을 비출 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지금 세상이 이처럼 어둡게 보이는 것은 우리 주변에 이처럼 진정으로 믿거나 깨닫는 이들이 적기 때문 아닐까?

제25절
목숨처럼 사랑하고 눈동자처럼 지키라
- 사랑과 자비의 공동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동료들을 여러분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고 그들을 여러분 자신의 눈동자처럼 지키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동무들을 네 목숨처럼 사랑하고 저들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풀이: 복음서에 예수님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22:39, 막12:31, 눅10:27)고 하신 말씀에 해당되는 구절이다. 이 말씀은 본래 레위기 19:18에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하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는 말씀은 <도마복음>에만 있는 말이다.

눈에 무엇이 접근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을 뿐 아니라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얼굴을 피하기도 한다. 혹시 눈에 티라도 들어가면 그것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 눈물까지 흘린다. 모두 눈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우리 이웃이나 우리 동료들이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불의,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학대, 신체장애 등의 희생자라면, 내가 내 눈동자를 자동적으로 지키고 보호하는 것처럼 그들을 그렇게 지키고 보호하라.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으로 뭉쳐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하라는 분부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이런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하는 식의 윤리적·율법주의적 의식에 바탕을 둔 의식적인 사랑은 사실 진정한 사랑이 못된다. 참된 사랑은 저절로, 자발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내 눈동자처럼 지키는 자발적, 무의식적, 무조건적 사랑, 남의 아픔이나 슬픔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진정한 사랑은 사실 영적으로 깨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뭣을 깨쳐야 하는가?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모두 하나라는 것, 나와 하느님, 나와 내 이웃, 그리고 나와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라는 것을 깨쳐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일상적 용어를 빌리면, 우리는 모두 한 분 하느님의 같은 태에서 태어났다는 것, 특히 도마복음서에서 강조하듯이 우리는 모두 우리 속에 신성(神性)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화엄불교의 용어로 해서, 이 세상 일체의 사물이 이사무애(理事無礙)·사사무애(事事無礙), 상즉(相卽)·상입(相入)의 관계로 서로 막힘이 없이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런 일체성(一體性)에 대한 체험적 깨달음이 있어야 모두와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가지고 남을, 내 몸처럼, 내 눈동자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랑이 솟아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내어줌을 강조하는 성경의 ‘아가페(agape)’ 사랑이나 남이 아파하면 나도 ‘함께 아파함(com-passion)’을 말하는 불보살의 자비심은 모두 이렇게 ‘더불어 있음(interbeing)’에 대한 존재론적 눈뜸에 근거한 사랑이다. 사랑은 물론 나의 이기심, 나의 옛 자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이런 영적 깨침을 이룬 사람들이 보여주는 최종의 결실이기도 하다.

참고: 여기 쓴 ‘interbeing’이라는 조어(造語)는 월남 출신 팃낫한 스님이 즐겨 쓰는 말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I am a girl.”이라 할 때 내가 소녀인 것은 소년이 있기 때문이고, 그 외에 나의 부모님, 내가 먹은 밥, 내가 마신 공기 등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따지면 나 홀로 “I am a girl.”이 아니라 “I interam a girl.”이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출처 :길벗들의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 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