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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사

가슴 저미는 14개 단문 유서

가슴 저미는 14개 단문 유서, 23분만에 썼다

헤럴드경제 | 입력 2009.05.24 12:09 | 수정 2009.05.24 12:43 |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정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23분에 불과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검찰의 수사착수와 지난달 30일 검찰소환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상당기간 심적부담을 겪어왔지만, 그가 가족에게 유서를 쓰는데 걸린 시간은 의외로 최종 수정까지 합쳐 23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따라서 오랫동안 생각을 정리했거나, 아니면 당일 우발적으로 투신을 결심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경남지방경찰청은 24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의 서거 경위 수사와 관련한 2차 결과 발표에서 노 전 대통령이 지난 23일 봉하마을 뒷산에서 몸을 던지기 전 상황을 역추적해 재구성한 결과 이같이 조사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23일 새벽 5시21분 문서 파일을 열었고, 5분쯤 뒤 1차 저장한 뒤 5시44분 문서 파일을 최종 저장했다. 5분여만에 유서를 작성하고, 18분동안 수정작업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또 노 대통령이 1차로 저장한 점에 미뤄, 심적 동요를 겪다가 최종적으로 투신결행을 결심했을 가능성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최후의 외출시 컴퓨터를 끄지 않았고, 사저를 지키는 비서관이 오후 1시쯤 유서가 쓰인 모니터 화면을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의 유서는 14개의 짧은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짧은 문장은 5자에 불과하고 길어도 21자를 넘지 않았다. 직접적이면서도 감성적인 표현이 주를 이뤘다.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기 직전임에도 자신의 생각을 정연하고 의연하게 정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며 처지에 대한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며 삶을 달관한 듯한 감정의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찰은 "23일 오후 4시5분부터 35분까지 경남청 사이버수사대장과 디지털 증거분석관이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라며 "유서가 저장된 시간대에 사저를 출입한 외부인이 없었던 점으로 미뤄 노 전 대통령이 유서를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 작성을 마친 뒤 곧바로 인터폰으로 경호팀에 '산책 나갈게요'라고 연락했고, 5시50분쯤 이모 경호과장을 만나 봉하마을 뒷산으로 출발해 6시20분쯤 투신 장소인 부엉이바위에 도착했다. 노 전 대통령은 바위에서 20분쯤 쉬다가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라고 말하며 이 과장의 시선을 돌렸고, 이 과장이 이들의 접근을 제지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투신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정확한 사건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권양숙 여사 등 유족들에 대한 조사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노 전 대통령 유서 원문 >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조용직 기자/yjc@heraldm.com